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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아침이 너무 좋아/박형준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6초

 


 내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눈빛을 건네면 나무 잎사귀가 피어난다
 아이들과 노인들이 친구가 된다
 그래서 햇살이라는 말에는
 아침이라는 말을 꼭 앞에 붙여야 한다
 산책길에 허물만 남겨 놓고 빠져나간 뱀
 밤늦게 연락도 없이 왔다가
 스타킹을 돌돌 말아 벗고 떠난 여자처럼
 말린 허물만 남겨 놓고 사라진 뱀의 감촉
 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길가 숲 속에 배를 뒤집고 죽은
 물고기의 눈에 비친 초록
 돌돌 말렸던 잎사귀들이 몸을 펴고
 강물은 눈부시고 잔잔하기만 한데
 봄의 아침 장례식엔 허물들이 많다


[오후 한 詩]아침이 너무 좋아/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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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롭지 않은가. 아무리 마음도 없고 의지도 없는 자연의 이법이라지만 아침마다 눈을 뜨면 눈부신 햇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아침 봄 햇살을 따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눈빛을 건네면" 그곳엔 반드시 "나무 잎사귀가 피어"나 있고.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햇살이라는 말에는" "아침이라는 말을 꼭 앞에 붙여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봄날의 아침은 또한 서늘하고 아쉽기도 하다. "스타킹을 돌돌 말아 벗고 떠난 여자처럼" "말린 허물만 남겨 놓고 사라진 뱀의 감촉"처럼. 이 문장들 속에서 저 에덴의 원죄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흔적은 미미하다. 그러나 "강물은 눈부시고 잔잔하기만 한데" "길가 숲 속에 배를 뒤집고 죽은" "물고기의 눈에 비친 초록"을 마냥 찬탄하기엔 어떤 미안함이,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아침에는 깃들어 있다. 오늘 아침은 누가 벗어 두고 간 허물일까, 아니 어떤 죽음이 이르지 못한 초록일까. "봄의 아침"은 그래서 오히려 애처로움과 내 "허물"만 같은 부끄러움으로 가득하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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