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왕의 탓' 그래도 인재(人災) 예방 총력…금주령 내리고, 방화벽 설치도
지난 6일 발생한 강원도 산불은 황금연휴를 지역의 재앙으로 바꾼 끔찍한 인재로 계속된 강풍에 좀처럼 불씨가 잡히지 않던 중 9일 오전 11시 20분 비로소 진화가 완료됐다.
7일 오후 6시에 진화가 완료되는 듯했으나 잔불이 강풍을 타고 되살아나 계속됐던 산불은 지난 2005년 낙산사 산불과 비슷한 전개양상을 보였는데, 면적의 82%가 산림인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화재에 취약한 소나무 산림이고 봄철 양양과 강릉 사이에 부는 강한 바람, ‘양강지풍’을 타고 번져나가 진화가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분석됐다.
산불이 발생한 강릉, 삼척, 상주는 앞서 언급한 지리적·기후적 특성으로 봄철 화재발생이 잦은 지역이었다. 조선 순조 4년(1804) 대화재 역시 금번 강원도 산불 피해 지역과 동일한 삼척 인근 6개 지역에서 발생한 재난으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피해가 큰 화재사고로 문헌에 기록돼있을 정도. 그렇다면 조선왕조는 화재와 같은 대형 재난에 어떤 방재대책을 세우고, 어떻게 대응책을 펼쳤을까?
천재지변이 임금 탓? 불도 새 불과 헌 불이 있다
유교의 ‘천도(天道)’ 실현이 왕조의 기틀이 됐던 탓에 천재지변은 곧 임금의 부덕함이 원인으로 지목받았으므로 조선의 왕들은 재난 앞에 속수무책 화살받이가 돼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화재사고는 약 550건이나 승정원일기가 기록한 화재사고는 약 2,500건, 그중 민가 발생 건수는 1792건으로 대다수가 백성의 부주의 및 방화가 그 원인이었으나 대형화재는 여지없이 하늘의 경계이자 임금 부덕의 소치로 간주됐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들은 화재가 인재임을 알고 유무형의 다양한 방재대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태조 이성계는 즉위 7년 차에 큰불이 나자 금주령을 내려 백성들이 평소 행동을 삼가도록 계도했고, 태종은 조선의 불을 새로 마련하는 의미의 개화령(改火令)을 내려 매년 5회 나무를 마찰시켜 불씨를 낸 뒤 묵은 불과 바꾸는 의식을 치름으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나섰다.
화재는 천재가 아니라 인재
성종 14년(1483) 도성 안 장통방에 불이 나자 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화재는 진실로 천재가 아니다. 실로 사람이 불을 조심하지 않은 탓이다.” 그는 즉위 이듬해인 1470년 5월 밥을 물에 말아 먹기 시작해 40일 넘게 그 식단을 고수했는데, 그해 조선을 강타한 극심한 가뭄 때문이었다. 유독 잦은 재난을 맞았던 성종은 화재를 삼가는 기계를 만들도록 지시할 만큼 화재를 철저한 인재로 판단했다.
조선 최다 화재 발생 지역은 강원도 동해안
조선시대 산불 기록 중 최대 규모는 순조 4년(1804)에 발생한 강원도 동해안 산불로 민가 2,600호, 사찰 3곳, 창고 1곳과 막대한 곡식이 소실되고 확인된 사망자만 61명이었다. 최대 인명피해를 기록한 산불은 현종 13년(1672) 강원도 동해안 산불로 6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성종 20년(1489)엔 양양에 산불이 나 민가 205호와 낙산사 관음전이 불에 탔는가 하면 중종 19년(1524)엔 강릉 산불로 민가 244호와 경포대 관사가 소실됐으며, 숙종 23년(1697) 발생한 강릉 산불은 대관령 아래 민가 65호를 전소시켰다.
역사기록에 따른 산불 발생 시기와 지역에 대한 자료에서 이번 강원도 동해안 산불이 조선시대에도 유사한 형태로 또 지속적으로 발생돼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화재 대응기술
현대에도 대형 화재에 자주 사용되는 방화벽(화재 발생 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우는 벽)은 이미 태종 15년(1415)에 처음 만들어졌다. 태종은 화재 대책에 특히 엄격한 군주였는데, 방화벽 제작을 명한 그 해 1월엔 ‘경칩 이후 불을 놓지 말라’는 금령을 거듭 내리는 한편 집이 붙어 있으면 화재 발생 시 옆 건물로 번지기 쉬우므로 가택 밀집지역의 중간 집을 헐고 곳곳에 물을 비축할 것을 권고했으며, 이에 앞서 기와 굽는 관청 별와요(別瓦窯)를 특별 설치, 불에 타기 쉬운 짚보다 기와 공급을 서민들에게 원만히 해 화재 시 피해를 최소화 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세종 또한 지방의 창고화재에 대비해 창고 간 기둥을 5~6개를 늘린 뒤 사이에 담을 쌓아 불이 번지는 것을 막고, 옥상에도 흙을 두껍게 발라 기와로 덮고 처마 밑엔 돌아가며 담을 쌓도록 해 현대의 방화구획에 해당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 화재발생 시 관공서에서 즉각 종을 쳐 경보 기능을 하게 했고, 궁의 화재 대비를 위한 대처요령을 별도의 책으로 마련해 철저한 대비에 나섰다.
조선시대 문헌이 기록하고 있는 산불의 위험성과 심각성은 놀랍도록 그 기간 및 지역과 유형에서 현재 우리나라 산불 발생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역사가 기록한 최대, 최다 화재 발생 지역에서 지난 나흘 동안 총 327ha의 산림을 태우고 진화된 강원도 산불은 때마침 내린 비의 도움이 없었다면 완전한 진화가 어려웠을 정도로 끈질긴 화마의 위력을 과시했다.
과거 조선의 왕은 큰 화재 앞에 자신을 책망하고 밥을 물에 말아 먹을 만큼 고통 분담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은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쳐도 내 책임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란 자리다’고 절규했다. 화재가 더 이상 천재가 아니라 인재임을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지금, 국가 재난 앞에 유독 길었던 리더의 부재가 원인은 아닐지언정 하나의 이유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역사가 지적하는 반복적 재난만큼이나 리더의 태도에 대한 연구와 답습이 절실한 시점이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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