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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칼(부엌칼)을 잡은 이유

시계아이콘01분 40초 소요

'앗!~' 기어코 피를 보고 말았다. 붉은 피가 뚝뚝 도마로 떨어졌다. 저녁으로 닭볶음탕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오랜만에 두 딸도 집에 있어 앞치마를 두르고 솜씨 좀 부려 보려던 참이었다. '탁 탁 탁 탁~' 리드미컬하게 재료가 다듬어지는 요리사들 칼질을 흉내 낸 게 화근이다. 양파는 보기 좋게 다듬어졌지만 단단한 감자가 문제였다. 양파와 감자를 같은 칼질로 허세를 부리려 했으니 될 리가 만무했다. 칼(부엌칼)을 잡은 지 1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칼질은 무섭고 어렵다. 자취와 캠핑까지 섭렵한 경력에 라면 좀 끓여 본 내공(?)인데도 말이다. 마눌님의 번개 같은 응급조치(상처와 닭볶음탕)에 주방은 다시 안정을 찾았지만, 딸들에게 점수 좀 따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곧잘 실수를 하긴 하지만 주방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20여년이 넘은 결혼생활 동안 꼬박꼬박 아침밥을 먹고 다녔다. 간 큰 남자란 소리를 수도 없이 듣고 살았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어느날, 가족이 둘러앉아 텔레비전(TV)을 보고 있을때다. 일명 '요섹남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이라 불리는 연예인들이 출연한 쿡방ㆍ먹방 프로그램이다. TV속에 등장한 멋진 남자들이 주방에서 능숙하게 맛깔스런 요리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낸다. 속으로 남자 망신시킨다며 눈을 살짝 흘기기도 했지만 솜씨들은 신기할 만큼 대단했다. 맛을 본 출연자들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 바빴다.

작은딸이 한마디 한다. "아빠도 저렇게 만들 수 있어요?"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허풍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당연한 거 아냐. 저 사람들보다 더 맛있게 만들지"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었다. 후회막심이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럼 일요일마다 아빠가 요리 하나씩 만들어 주세요." 딸은 카운터펀치까지 한 방 날렸다.


세월이 흘렀다. 피(?)나는 노력 덕분에 그나마 맛볼 수 있을 만한 음식(요리라고 말할 순 없다)들이 만들어졌다. 그래봐야 비슷비슷한 음식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허풍 덕분에 음식 만드는 일이 재미있다. 이번엔 무엇을 만들어볼까 고민하는 시간도 재밌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것도, 도마 위에 재료를 펼쳐놓고 하는 칼질도, 중간 중간에 하는 실수도, 완성된 음식을 그릇에 옮겨 담아 놓는 것도 재밌다. 이보다 더 재미난 것은 가족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휴일 저녁, 어김없이 가족들은 식탁에 모여 앉는다. 어떤 음식을 내놓아도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준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을 추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게다. '아빠 최고' '대단하다' 라는 한마디에 다시 부엌으로 향하게 되니까.


혼밥, 혼술…. 혼자 하는 일이 많은 세상이다. 세태를 반영하듯 식당에는 벽을 마주보고 앉는 1인 좌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제 '밥은 함께 먹는 것'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다. 하지만 옛날 어르신들은 "식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먹어야 맛있는 것" 이라고 했다. 나 또한 그런 세대다. 혼자 먹자고 음식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음식을 준비한다. 그 시간이 즐겁고 재밌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허풍으로 시작된 부엌일이 지금은 가족에게 내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어 버렸다.


손가락 피 좀 보고, 주부습진(요즘 나타난 증상) 좀 생긴다고 뭐가 대수겠는가. 가족들과 나눌 수 있는 저녁 있는 삶이 있다는 게 더 소중한 일인걸. 부엌데기가 된 것이 즐겁다.


조용준 사진부장ㆍ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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