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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베테랑의 귀환, 가을 시집 세 권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18초

'사월바다', '초혼', '북촌'

운전면허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적성검사 등을 다시 한다. 면허소지자가 계속 운전을 해도 좋은지 판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 자격을 부여한 다음 자격 부여 당시의 능력과 자격을 지속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유지하는 제도는 많지 않다. 대학에서 주는 박사학위만 해도 그렇다. 학위 취득 이후 논문 한 줄, 저서 한 페이지가 없어도 죽을 때까지 박사 대접을 받는다. 대접이라고 해 봐야 별 거 없긴 하지만.


사정은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특히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친 문학예술가가 그러하다. ‘시인’이나 ‘소설가’, ‘평론가’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다음에라도 박탈되지 않는 신성한 자격에 속한다. 그러니 ‘과작’을 자랑삼는 시인이 적지 않고 신춘문예 당선 이후 단편 한 조각 발표하지 않은 소설가가 수두룩한 것이다. 허나, 유서 깊은 ‘디오픈(The Open) 골프대회에 나가 펄펄 뛰는 PGA의 슈퍼스타들과 대등하게 겨루는 시니어 스타들이 적지 않듯이, 어중 뜨기 작품을 닭이 알 낳듯 반복해서 생산해 내며 의미 없는 나날들을 시인 또는 소설가의 관을 쓴 채 힘겹게 넘어가는 애송이들을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베테랑들이 건재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이란 청춘의 사업이기가 쉬워서 특히 시인의 경우에는 20대 초반에 시단에 이르지 못하면 포기하고 소설이나 수필 같은 장르로 전향해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시란 감성의 언어로써 호소하니 그럴 법하지만 반드시 그렇다면야 이백과 두보의 나이 들어 쓴 시 또한 버려야 마땅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부당함을 알 것이다. 가을 들어 그 이름만으로도 묵직한 베테랑, 노장들이 잇달아 시집을 찍어내니 반갑기 그지없다. 고은, 도종환, 신달자 같은 분들이다.


[신간안내] 베테랑의 귀환, 가을 시집 세 권 사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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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바다(창비)=도종환이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열한 번째 시집. 시를 즐겨 찾지 않는 독자라면 여전히 ‘접시꽃 당신’의 시인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도종환은 먼 시의 길을 고집 있게 걸어온 사나이다. 2012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다음 올해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한 현장 정치인이기도 하다. 야당 정치인의 전투적 구호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도종환은 어떤 편견도 불허할 정도로 반듯한 시를 생산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시를 읽으면 그보다 먼저 시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시인들의 굵은 음성이 들릴 법도 하다.

‘찬술 한잔으로 몸이 뜨거워지는 겨울밤은 좋다/그러나 눈 내리는 저녁에는 차를 끓이는 것도 좋다/뜨거움이 왜 따뜻함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며/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겨울 저녁/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 쓰던 붓과 화선지도 밀어놓고/쌓인 눈 위에 찍힌 산짐승 발자국 위로/다시 내리는 눈발을 바라본다/대숲을 흔들던 바람이 산을 넘어간 뒤/숲에는 바람 소리도 흔적 없고/상심한 짐승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여러날/그동안 너무 뜨거웠으므로/딱딱한 찻잎을 눅이며 천천히 열기를 낮추는 다기처럼/나도 몸을 눅이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겨울 저녁(전문)


[신간안내] 베테랑의 귀환, 가을 시집 세 권 초혼

■초혼(창비)=고은이 낸 새 시집의 제목은 제2부의 ‘초혼’에서 왔을 것이다. 무례하지만 시인의 최근 이미지와 생산해내는 작품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무천도사’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면 나이 여든에도 한 말 밥에 고기 열 근을 먹으며 조나라를 지켰다는 장수 염파. 올해도 노벨상과 관계가 없었다.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많다. 출판사는 책을 소개하는 글을 사뭇 유장하게 주워섬긴다.


‘원고지 130매 분량에 달하는 회심의 역작으로, 아마도 이번 시집은 이 작품을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은 소월의 운을 빌려 “원통하고 절통한 근대 백세 난리 중에/천부당만부당으로 스러져간” 영혼들을 “피 토하는 득음공부 소리공부 다 바쳐” 삼가 위무한다. “저 상고시대 백제 망령 고구려 망령”부터 “우금치 갑오농민군 을미의병 영령” “왜땅 관동지진 난리 속”에 살육당한 조선 동포의 “처처참참한 몇십만 신위” “제주 4·3 원혼 십만 각위” “거창 참변의 시퍼런 넋들” “지리산 한령” “광주 안팎 민주영령” “다 죽어도 아직껏 펄펄한 목숨”인 ‘세월호’의 “어린 신위들”까지 억울하게 죽어간 넋들의 “얽히고설킨 한”을 푸는 “애끊는 절창”의 “원한풀이 해원굿”이다.’ 아래는 인용시.


‘나 돌아가지 않으리라/나 하늘로/나 도솔천/나 용궁 심청/나 천제의 하늘/나 환인의 하늘/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나 소월의 초혼 신 내려/이 고려강토/이 고려산천 도처마다 떠돌며/신방울 울려/신북 치며/신피리 불며/내 비록 맺힌 소리나마/이 소리로 소리제사 소리공양 내내 올리며/이 땅의 반만년 원혼 혼령 위무하며/살아가고저’
- 초혼(부분)


[신간안내] 베테랑의 귀환, 가을 시집 세 권 북촌

■북촌(민음사)=요즘 북촌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매우 붐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가면 어디 들어가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차 한 잔 들이켜기도 쉽지 않다. 누군가는 ‘북촌의 한옥은 전통 한옥이 아니고 집장수들이 마구 지은 집’이라고도 하고 ‘관광객(특히 중국인)들이 몰려들어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고도 불평한다. 그러나 북촌은 북촌이고 세상의 그 무엇도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지 않는다. 파리에 가면 반드시 가봐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 몽마르트르나 로마에 있는 스페인 광장도 로트렉이나 위트릴로의 시대, 헵번의 시대와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출판사는 신달자의 새 시집에 대해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시집에 실린 70편의 시들은 오로지 ‘북촌의, 북촌을 위한, 북촌에 의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시인 곽효환은 “오늘 시집 ‘북촌’을 열어 보니 북촌의 크고 작은 삶과 일상들이 차고 넘친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골목골목에서 만나는 근대사의 유적과 인물들,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방문객들이 빚어내는 풍경들이 꽃처럼 흘러들어 공일당 “한옥 처마 밑의 꽃피는 빗소리”로 다시 태어나 있다. “지상에서 가장 애틋한 언어”를 입은 북촌이 시인의 스승 목월이 되고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고향을 품은 지리산이 되어 있는 것이다. 볕 좋은 날, ‘북촌의 솟대’가 된 시인의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산책길에 나서야겠다”고 했다.


‘한옥 창 열고 먼 곳에/ 불 켜진 창 하나 본다/ 저 창 안에 누가 사나?/ 더 높은 곳에서 보면/ 나의 창도 아름다울까/ 지상에 가까스로 핀 별꽃처럼/ 아득하게 나도 그리움이 될까’.
- 깊은 밤(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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