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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영웅에 선정된 최득수 육군 이등상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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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전쟁 영웅에 선정된 최득수 육군 이등상사는 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김경천(1888.6~1942.1)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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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내년 1월의 6ㆍ25전쟁 영웅에 최득수 육군 이등상사가, 독립운동가에 염재 조희제 선생이, 호국인물에 김경천 독립운동가가가 선정됐다.

31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내년 '1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국군 제7사단 8연대 2대대소속 최득수 이등상사는 중공군이 1953년 6월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 아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강원도 양구 인근의 비석고지를 점령하자 백병전까지 치르며 격렬한 반격을 시도했다.


적 수류탄에 대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수차례에 걸친 역습에도 적은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으로 아군의 인명 손실만도 1천3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전투는 격렬했다. 1953년 6월 30일 오전 2시, 전우의 희생을 보다 못한 제8연대 2대대는 30명의 대대원으로 특공대를 조직해 최후의 결단을 실행했다. 수많은 전우의 목숨을 앗아간비석고지에 설치된 적의 기관총 진지에 이르자 특공대 제1조장인 최득수는 곧바로 선두에 서서 돌진했다.

특공대는 적의 격렬한 포격을 뚫고 기관총을 파괴했고, 대기하던 아군은 오전 4시30분 적의 진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특공대원 30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최득수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다. 보훈처는 최득수 이등상사의 이런 공훈을 기리어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염재 조희제(1873~1939) 선생은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 의병장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투사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의 행적 등 항일투쟁 기록을 모았다. 법정에서 애국지사의 재판 과정을 방청하고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의 충절을 발굴해 염재야록을 편찬했다.


1938년 선생의 호를 따 제목을 붙인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선생의 글과 집안 대대로 간직해온 다양한 자료가 모두 압수됐다.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집으로 돌아왔으나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일제의 단발 종용에 결국 자결 순국했다. 염재야록은 당시 의병운동사와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높다. 정부는 항일 의병과 애국지사의 행적을 목숨 걸고 기록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김경천(1888.6~1942.1) 독립운동가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장교로 근무했다. 1919년 2ㆍ8독립선언이 터지자 일본 군대를 탈출해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후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고, 지청천, 신동천 등과 남만주 '3천(三天)'으로 불리며 만주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무기구입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조선인에 대한 일본군의 감시가 심해져 활동이 어려워졌다.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했으나, 당시 그 지역도 일본의 조종을 받는 중국계 마적 때문에 한인동포들의 피해가 컸다. 수청지역의 창해청년단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 소탕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전투할 때 백마를 타고 기병부대를 지휘해 '하얀 말을 타고 만주 시베리아를 누빈 항일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


1937년 스탈린정권의 강제 이주 정책에 반발했다가 간첩죄로 수감됐다. 1942년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리어 1998년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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