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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돈이다]강남 탄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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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 “이럴 바엔 서울시는 차라리 가칭 ‘강남특별자치구’ 설치를 중앙에 건의해 아예 강남구를 서울시에서 추방시키실 용의는 없으십니까?”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지난 10월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보낸 공개 질문이다. 삼성동 옛 한국전력 부지 개발 사전협상에 강남구가 배제돼 “너무 고통스럽다”며 항의성 질문을 한 것인데 후폭풍이 거셌다.

누리꾼들은 “강남 자체적인 쓰레기장과 발전기를 따로 운영하고 전철도 강남은 무정차 통과시켜야 한다”는 등 분노의 댓글들을 쏟아냈다. 일각에서는 ‘리치포비아’(부자 혐오)까지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조6500억원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는 한전 부지 공공기여금을 영동대로 등 강남구 관내 지역 개발 사업에 우선 사용해야 한다는 게 강남구의 주장이다. 서울시는 공공기여금을 강남구 관내에 쓰겠지만 인접한 잠실종합운동장 일대 개발 사업에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강남구가 말하는 ‘우선 사용’에는 ‘대부분 사용’의 의미가 녹아 있다.

이를 비판하는 이들은 “다른 지역의 자원들이 집중됐기 때문에 강남이 이만큼 발전한 것인데 이제 와서는 거액의 기여금을 독식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50여년 전만해도 강남은 서울 땅도 아니었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광주와 과천 등의 일부가 서울에 편입되면서 강남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시는 1971년 하반기에 3300만㎡의 영동지구 개발을 계획해 우선 논현동에 서울시 및 산하기관 공무원 거주 용도로 360가구의 아파트를 지었다. 허허벌판에 당시로서는 생소한 아파트이다보니 입주자에게 일부 자금을 무상으로 지원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나는 돈이다]강남 탄생기 1971년 서울 논현동에 지어진 공무원아파트 모습(출처: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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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1973년에는 압구정동, 논현동, 학동, 청담동 등에 단독주택 단지를 조성했는데 이 곳의 입주자들이 현재 강남 신화의 첫 발을 디딘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시는 시내버스 노선을 강제 배정했으며 강남의 땅이나 건물을 사면 세금 감면 혜택을 줬다. 건물 부지 최소 면적은 89㎡에서 165㎡로 늘렸다.


1970년대 서울의 최대 과제는 강북 인구 집중 억제였다. 1972년 당시 양택식 시장은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 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등에 바, 캬바레, 나이트클럽, 술집, 다방, 호텔, 여관, 터키탕 등 각종 유흥시설의 신규 허가는 물론 이전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그 뿐 아니라 종로구와 중구 전역, 용산과 마포구 내 시가지, 성북구와 성동구 일부 지역을 아예 특정시설제한구역으로 묶어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의 허가를 내주지 않고 핵심 지역에는 건물의 신축이나 증축도 불허했다.


한 쪽을 죄면 다른 쪽이 부풀게 마련이다. 기업과 상업시설들이 강남으로 옮겨가고 신사동, 압구정동, 논현동 일대가 유흥가로 변해갔던 것이다. 1973년 말 5만여명이던 영동지구 인구가 5년 후인 1978년에는 21만여명으로 네배나 늘어났다.


현재 강남 부동산을 떠받치는 핵심 기반인 학군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강북의 경기고와 서울고, 숙명여고, 경기여고 등 유서 깊은 명문학교들을 강남으로 옮겨가도록 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학원가가 형성되면서 교육의 메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강남은 자생적으로 성장했다기보다는 철저한 계획에 따라 육성된 것이다.

[나는 돈이다]강남 탄생기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겨가 지어진 경기고(출처:서울시)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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