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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치의 병사들', 홀로코스트는 '프레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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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치의 병사들', 홀로코스트는 '프레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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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두 아이는 자기가 묻힐 무덤을 팠어요. 구덩이 두 개를 판 거지요. 그리고 한 아이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 아이는 무덤으로 곧바로 떨어지지 않고 그 앞에 넘어졌어요. 그리고 남은 아이를 사살하기 전에 그 아이한테 죽은 아이를 구덩이에 던지라고 했대요."

"프랑스 놈 하나를 뒤에서 쏴 죽였어요. 자전거를 타고 있는 놈이었죠." "아주 가까이에서요?" "그렇죠." "그놈이 당신을 잡아가려 하던가요?" "뭔 헛소리예요. 그 자전거가 탐났거든요."


"제가 하리코프에 있을 땐 시내만 빼고 전부 파괴됐어요. 멋진 도시였고 멋진 추억이었죠.(중략) 어딜 가든 여자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의무 노동 복무를 하는 여자들이었어요." "아, 끝내주네요!" "그 죽이는 여자들이 길을 다 닦았다니까요. 우리는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승용차에 그 여자들을 무조건 끌고 들어와서 그냥 해 버리고 다시 길바닥으로 던져 버렸죠. 걔들이 어찌나 욕지거리를 퍼붓던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군의 대화다. 생생하다 못해 적나라하다. 유대인 600만 명을 포함해 모두 5000만 명을 학살하고도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최소한의 연민이나 미안함도 없다. 심지어 임신부나 유모차에 탄 아이를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한다.


역사학자 죙케 나이첼은 2001년 가을, 영국 국립보존기록관에서 독일군의 대화가 담긴 서류 뭉치를 발견한다. 2차 대전 당시 영국군이 포로로 잡은 독일 병사들을 도청해 기록한 문서였다. 그들의 담담함에 충격을 받은 저자는 더 많은 자료를 찾아 나섰고 얼마 뒤 미국 워싱턴 국립기록관리처에서 10만 쪽 가까운 도청기록을 발견한다. 나이첼은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와 함께 연구에 몰입했다. 그 성과가 '나치의 병사들'이다.


도청기록은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수사기록, 군사우편, 증언록, 회고록 등 이제껏 인류가 쌓아온 전쟁과 폭력에 관한 기록에는 허점이 많았다. 기록을 위한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을 감안해 의식적인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증언은 진솔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도청기록은 다르다. 수용소의 군인들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의 말이 언젠가 '자료'가 될 것이라고는, 하물며 출판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내뱉은 그들의 말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나아가 전쟁을 치른 군인의 심리를 통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들의 대화에서 전쟁의 야만과 고난, 냉혹함에 대한 논쟁이나 도덕적 반박, 싸움은 찾아볼 수 없다. 독일 병사들은 오히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한다. 무엇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을까? 개인이 집단의 잔혹함에 동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종주의 때문일까? 이데올로기의 문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까?


홀로코스트의 원인으로 '인종주의'가 가장 빈번하게 지목된다. 독일 병사들의 대화 기록을 보면 유대인뿐 아니라 러시아인, 폴란드인 등 동유럽 민족에 대한 멸시와 증오가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인은 겁쟁이로, 일본인은 광신도로 묘사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인종주의가 나치 병사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게 만든 유일하거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고 말한다.


나치즘라는 이데올로기의 영향도 미미하다고 본다. 그들은 "진정한 '세계관 전사'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보통 군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이 상황이 왜 생겨났는가에 대해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전투가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들의 인식 전면에 나타나는 것은 임박한 승리이지 '동부 지역의 정복'이나 '볼셰비즘 위협의 방어' 같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이런 관념은 전쟁과 전투 행위들의 배경일 뿐, 개별 군인의 해석과 행동의 구체적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주장한다.


나이첼과 벨처가 지목한 것은 '프레임'이다. 프레임이란 역사적, 문화적, 상황적 체험에 따라 만들어지는 인식과 사고의 틀을 의미한다. 그들은 평범했던 독일 병사들이 '전쟁' 프레임에 갇혀 사고하다 괴물로 변했다고 말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은 갑자기 전쟁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는 그들에게 새로운 소속감과 역할, 가치 판단의 기준을 주었다. 병사들이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이든 제대로 완수해 내는 일이었다. 민간인일 때 훌륭한 회계사, 농부, 목수였던 것처럼 군인으로서도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들은 '군인다움'에 의거해 인식하고 행동했다. 사병은 장교의 행동을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고 평가했다. 장교도 사병의 행동을 그렇게 바라봤다. 내면화된 가치 규범은 전우나 적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도 검열하게 만들었다.


전시가 아니라면 결코 극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인종주의, 군사적 가치에 대한 숭배, 과도한 남성성이 새로운 권장가치가 되었다. 시민적 도덕규범이 멸시되고 인본주의나 민주주의는 허약함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1933년 히틀러가 막 집권했을 때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범죄였지만, 불과 8년 후엔 모두가 '최종해결'(유대인 절멸)을 받아들이고 도왔다. 사회적 프레임이 바뀌는 데 불과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책은 기존 홀로코스트 연구의 관점을 벗고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들이 뛰어넘은 것 중의 하나는 한나 아렌트가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다. 아렌트는 나치시대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에 마지못해 부역했을 뿐이고 그것은 '생각 없음'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들은 악에 있어서 평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적 범죄의 주변에 있었던 누구도 가해자라는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관객이나 방관자는 없다. 모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어떤 사람은 더 강력하고 열성적으로, 어떤 사람은 좀 더 회의적이고 무관심하게, 공동의 사회적 현실을 함께 만들어낼 뿐이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쳐 지음/김태희 옮김/민음사/3만2000원>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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