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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화폐단위 변경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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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화폐단위 변경에 대한 단상 김두경 전 한국은행 발권국장, 현 SK하이닉스 사외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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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화폐단위 변경에 대한 논의가 들끓고 있다. 실제 화폐경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크게 난리 칠 일도 아닌데 말이다.


화폐단위를 변경한다고 하면 과거의 화폐개혁이 떠올라서인지 극력 반대론자가 나타난다. 화폐단위 변경은 그동안 두 차례 있었던 화폐개혁과는 목적이 전혀 다른 사안이다. 만일 예전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화폐개혁과 같이 예금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에는 실패할 것이다.

실생활에서 잘 들어 보지도 못한 경단위(10의 16승)를 자주 쓰면 거래규모 파악이나 계산하는 데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 될 것이므로, 최근 화폐단위 변경에 대한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 같다.


최근 많은 커피숍이나 일부 의류점에서 1000분의 1로 낮춘 가격표를 제시하는 등 실생활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가격이 인상됐다거나 결제하는 데 혼란스럽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오히려 가격 표시가 깔끔해 보여 신세대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

문제는 부작용이 얼마나 있느냐인 것 같다. 화폐단위를 1000분의 1로 변경하면 상인들이 은근슬쩍 자투리 가격을 올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유로화 변경 시처럼 3~4개월 정도 신구가격을 병행 사용하면 커피숍에서 보듯 거의 우수리 절상 없이 쉽게 적응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조금이라도 우수리 절상으로 가격을 올리게 되면 금방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고발되지 않겠나? 그리고 카드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우수리 절상 필요성이 적은 환경도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02년 유로화 도입 시 각국이 당시 환율대로 유로화로 바꿨을 때도 우수리 절상 등으로 상반기 중 0.2% 이내의 물가 상승만을 기록했고, 2005년 화폐단위에서 0을 6개나 떼어낸 터키에서도 물가에 영향이 있었다는 얘기가 없다.


또한 현재 1원 단위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므로 미국과 같이 보조화폐(1달러=100센트)를 도입하면 큰 무리 없이 화폐단위 변경이 정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거시경제 여건을 보면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상황이라 시행 시기도 적절해 보인다.


한편 언젠가 있을 남북한 통일에 대비해서도 필요하다. 통일 후에 화폐단위를 변경하려면 혼란기 등을 감안할 때 어려움이 많으므로 사전에 준비해 놔야 통합화폐로 사용할 수 있다. 예전에 인도네시아 출장 시 저녁 시간이 늦어 호텔에서 식사하려는데 생선초밥 1인분에 24만루피아여서 원화로 환산하느라 당황한 적이 있다.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한국 방문객들이 큰 혼란 없이 돈을 좀 더 쓰게 돼 관광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만들 지폐를 첨단 위폐방지 장치가 적용된 현용지폐에서 0을 세 개만 떼어내고 현재 디자인을 사용한다면 발행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고, 지폐 규격이 현재와 같아 현금입출금기(ATM) 센서도 크게 바꿀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고액권의 추가 발행은 이미 오만원권이 있어 고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회계처리 시스템 및 지급경제시스템을 바꾸고 통계숫자들을 조정해야 하지만 현재 사용 프로그램에서 입출력 숫자를 1000분의 1로 조정하는 것이므로 약 2년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편 외국의 사례와 같이 신구화폐를 약 1년간 병행 사용하고 그 후에도 익명으로 무제한 교환하도록 하면 큰 충격 없이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예금 동결조치가 없고 익명으로 무제한 신구권을 교환할 수 있다면 지하경제 양성화로 인한 불안감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물가가 안정돼 있고 앞으로 인구가 줄어들 전망이어서 부동산 투기를 조장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화폐단위가 변경되면 국민들의 실생활 편의가 증진되고 주요 선진국과의 환율이 1대 1 정도로 대등한 관계가 돼 국가 위상이 제고될 것이다. 이 밖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네 자리 환율을 갖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오명을 벗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는 화폐개혁이 아니므로 공개적인 토론을 거쳐 중론을 모아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김두경 SK하이닉스 사외이사, 전 한국은행 발권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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