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도덕경의 즐거움]김춘수의 '꽃'과 노자 도덕경(3)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2초

[도덕경의 즐거움]김춘수의 '꽃'과 노자 도덕경(3)  
AD

노자는 천하의 시작인 어머니를 위할 수 있어야 그 어머니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고, 김춘수는 내가 꽃을 낳은 어머니가 되어준 것처럼 누군가 '나'를 낳아주는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주문한다.


김춘수 시의 구절을 노자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풀어보자. "노자인 내가 '도'의 탄생의 비밀을 알려준 것처럼, 너희들도 노자가 말한 진짜 '도'로써 나를 불러다오."

다시 조물주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풀어보자. "조물주인 내가 만물이 시작된 비밀을 알려준 것처럼 너희들도 조물주가 의미하는 우주의 진실로써 나를 불러다오."


예수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풀어보자. "내가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내가 말한 그 하느님의 빛깔과 향기에 걸맞은 진정한 믿음으로 나를 불러다오." 그러면 이분들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마지막 구절이 그 대답을 담고 있다.

"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나는 너한테로 가서 네가 구하는 우주의 진실 혹은 하느님 옆자리를 너에게 줄 것이다."


이러니 이 시가 어쩌 형이상학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말을 어떤 바람둥이의 발언으로 생각하고 읽어보자.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 것처럼 나의 그 사랑한다는 말의 에너지와 관용에 걸맞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렴. 그러면 나는 기꺼이 너에게로 가서 너의 아담이 되고 싶단 얘기야." 이보다 더 허리하학적인 제안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태어난 것을 알게 되면 그 근원도 알 수 있다는 말은 노자가 이 책을 통해 끝없이 반복하는 후렴같은 것이다. 노자는 이 구절 끝에 잊지 못할 말을 하나 붙여놓았다. 물신불태(沒身不殆)가 그것이다. 몸은 죽어도 아무 걱정이 없다는 뜻인데, 이 말이 갑자기 왜 나왔을까.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사물의 생성을 얘기한다는 것은 당연히 죽음까지도 세트로 얘기해야 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곧 아들이니, 죽음이 아니라 끝없는 순환이며 파동같은 흐름이 아닌가. 그러니 죽어도 걱정이 없다. 도(道)는 삶과 죽음보다 더 근원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생멸은 그 근원 위에서 꽃 피고 꽃 지듯 이뤄지는 것이다. 김춘수가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다는 것이,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아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을 넘어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은 모두 (善建者) /무엇이 되고 싶다. (不拔)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善抱者)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不脫 子孫以祭祀不輟)


김춘수가 왜 많은 대상 중에서 '꽃'을 택했을까. 성적인 뉘앙스나 심미적 소재로 택한 것일까. 그럴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꽃'은 한 글자이다. 언어학에서는, 한 글자로 된 낱말이 지닌 공통적인 어떤 특징에 주목한다.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