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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즐거움]김춘수의 꽃과 도덕경 제1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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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의 즐거움]김춘수의 꽃과 도덕경 제1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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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시인 김춘수(1922~2004)는 식민지 시절 통영서 태어나 호주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을 만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춘기 때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누려온 삶의 '은총'에 대해 번민하면서 5년제 중학교 졸업을 석 달 앞두고 자퇴를 했다 한다. 이후 세상의 정의를 실천하고픈 욕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법과대학 입시 준비를 하다가 어느 서점에서 릴케의 시를 읽고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1940년 일본대 예술과에 입학해 영미 문학 작품들을 섭렵한다. 1942년 나가사키항구에서 하역노동 알바를 하다가 무심코 일본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는데 이것이 빌미가 돼 7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대학에선 퇴학당한다.

해방 무렵 그는 유치환, 윤이상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었고 마산중학교 교사로 지낸다. 1970년대 경북대 문리대 국문과의 저명한 교수가 됐고 이 땅의 많은 문학도에게 영감을 일깨워준 '김춘수의 시론'을 저술한다. 1980년 이후의 정치적인 역정에 대해선 공과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왕성한 삶을 살았으며 이 나라 시의 한 변경을 개척한 '위대한 언어들'의 한 고봉(高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김춘수의 '꽃'은 시가 지닌 매력과 미학적 완결성, 쉬운 언어들이 일궈낸 심오한 정신성, 원형적인 아름다움과 일상적인 성찰의 결합 등 뭐라 말해도 다 말해지지 않으면서, 그냥 시를 읽는 것만으로 그 모두를 어느 감관인가로 섭취하고 있는 하나의 '언어생명체'라 할 수 있는 진기한 걸작이다. 학생 시절 이 시를 대할 때,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듯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알쏭달쏭해져서 그저 밤송이를 까지도 못한 채 뒹굴뒹굴 굴리고 있는 듯한 답답함을 만나기도 했다.

이제 문득 돌이켜 이 시를 보니, 그 절대적인 심오함과 분해할 수 없는 소박함이 어떻게 결합됐는지를, 여전히 캄캄한 가운데 얼핏설핏 목도하게 된다. 도덕경의 행간들을 들락거리면서부터인 듯하다. 김춘수의 '꽃'은, 거의 정확하게 도덕경 한 권이 품고 있는 메시지의 정수를 아우른다. 이 시를 이해하는 것은 노자의 사유와 노자가 말하고자 했던 도(道)의 경계를 손으로 생생히 만져보는 것과 같다고 믿게 됐다.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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