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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통일전선의 ‘운명’…좌우 외면 번번이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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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당 방해하지 않았다면…임정 조기 참여해 OSS 작전 실행 가능했는데

[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좌와 우는 독립운동 세력 속에서도 스펙트럼을 넓게 펼치고 대립했다. 좌파는 조선의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무산계급의 해방을 함께 추구했다. 우익은 민족국가의 주권 회복을 목표로 잡았고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했다. 좌우 각 진영 내부에서도 갈등이 협력보다 더 잦았다.


이런 좌와 우의 중간에서 양측을 아우르려는 시도는 실패할 공산이 컸다. 중도파는 양측을 끌어들이기는커녕 존립 자체가 쉽지 않았다. 어느 진영인지 선택해야 하는 계기가 발생할 때마다 조직원이 좌나 우로 이탈했기 때문이다.

김원봉 통일전선의 ‘운명’…좌우 외면 번번이 실패 약산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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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고려할 때 진보적이었지만 좌파 쪽에서 보면 중도였던 독립운동 투쟁가 약산 김원봉(1898~1958)의 항일 통일전선 구축 노력은 비극적인 운명이 예고돼 있었다.


이 운명엔 항일투쟁에만 주력하고 권력에 집착하지 않은 그의 성향도 한몫 했다. 그는 “가끔 손해 보는 일을 잘 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산은 좌우가 함께 일본에 함께 맞서도록 할 합작을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다. 아마도 약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지닌 한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지 싶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의 민족애와 대일투쟁 의지가 너무 뜨거웠을지도 모른다.


◆ 민족해방 위한 연합 주장= 약산의 좌우합작 노력을 전하기 앞서 그의 이념적 지향을 살펴보자. 민족주의자 약산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재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 황포군관학교는 중국의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의 결과로 설립됐다. 제1차 국공합작은 주권 확립, 군벌 타도, 민족 통일을 목적으로 한 국민당-공산당ㆍ소련 연합이다.


황포군관학교 교관들은 좌파가 많았다. 학생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군관학교 정치부의 부주임이 주은래였다. 주은래는 공산당 광동성위원회 서기를 겸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국민당 대표로 파견돼 있던 요중개와 장개석조차 1925년까지는 연소와 용공을 지지했다. 교수부 부주임 엽검영과 교련부 부주임 등연달도 좌파였다.


약산의 사상은 1932년 개교한 조선정치군사간부혁명학교(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들에게 교관 자격으로 한 강의 내용에서 파악할 수 있다. 약산은 조선민족의 해방을 이룬 다음 진정한 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가야 한다고 구분했다. 그는 민족해방이 이뤄지는 시기까지는 노동자ㆍ농민ㆍ소시민계급은 토착 부르주아와 중소 지주, 민족주의자를 망라한 연합을 형성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지주계급은 지주계급은 물론 토착 부르주아 계급도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한 것과 차이가 컸다.


약산은 사상적으로는 중국 공산당과 가까웠지만 대일투쟁에서는 국민당과 손잡았다. 조선혁명간부학교도 국민당 정부에서 지원받아 설립ㆍ운영했다.


◆통일전선 좌우 외면받아= 약산은 좌우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약산은 1929년 사회주의 운동 세력과 연대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결성했지만 일국일당주의의 원칙을 중시한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이단으로 여겼다.


재건동맹은 코민테른이 부여한 정통성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의 약칭으로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돼 각국에 지부를 두고 혁명운동을 지도ㆍ지원했다. 그래서 국내에 파견된 재건동맹의 공작원들은 곳곳에서 배척받은 것으로 보인다.


약산은 1932년 한국독립당 등을 끌어들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김구는 약산이 자신의 사회주의 성향을 은폐하기 위해 통일동맹을 조직했다고 판단해 참가하지 않았다. 통일동맹은 그래서 협의체 수준에 머물렀다.


약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1935년에도 통일전선당 창립에 나서 민족혁명당을 출범시켰다. 이는 코민테른이 1935년 제7차대회에서 채택한 ‘반파쇼 인민전선과 반제민족통일전선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상해 임정을 장악하고 있던 한국독립당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단체인 의열단이 신당 건설을 주도하고 있다는 이유로 창당에 반대했다. 김구는 신당이 코민테른의 조종을 받는다며 참가를 거부했다.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도 신당에 불참했다.


김구는 민혁당이 결성되자 임정으로 돌아섰다. 그는 1920년대 말 이래 임시정부를 등한히 해왔었다.


민혁당은 활동자금과 중앙조직을 둘러싼 갈등을 끝에 이청천이 갈라져 나가면서 위상과 역할이 축소되고 말았다.


◆조선의용대 조직해 활약= 일본의 노구교 습격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1937년 제2차국공합작에 들어간다. 이런 흐름에 따라 중국 내 조선인 사이에서도 일치항일 여론이 높아졌다. 민혁당은 해방동맹ㆍ혁명자연맹과 함께 조선민족전선통일촉진회를 결성했다.


김구는 따로 한국광복단체연합회를 조직했다. 광복단체연합회는 공산주의 세력의 출현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혼란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명시했다.


약산은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대 건설을 제안해 승인받았다. 약산은 광복단체연합회에 조선의용대를 함께 조직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받았다. 1938년 조직된 조선의용대는 2년 동안 중국 전투지역에 분산 배치돼 특히 대일선전공작에서 기여했다.


조선의용대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주력부대 팔로군과 결합하게 됐다. 중경에 남은 조선의용대는 인원으로 소수가 됐고 약산은 조선의용대 전체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했다.


◆임정이 약산을 일찍 기용했다면= 민혁당은 1941년 임정 참여로 노선을 바꿨다. 반대하던 한독당은 여론의 압력에 밀려 1942년에야 민혁당과 통일의회를 구성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약산은 임정에서 한독당 일당체제를 개혁했고 1944년 임정 군무부장을 맡았다. 광복군은 그때까지도 모든 권한이 중국에 예속돼 있었다. 약산은 군사권 반환 요구에 앞장서 1945년 5월 광복군을 임정 휘하 자신의 지휘 아래로 넘겨받았다.


약산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조야에서 신망을 얻은 한길수를 통해 미국 국무성의 협조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한길수는 한반도에 특수부대를 침투시키는 작전에 대한 미국 국무성의 지원을 요청했다.


김원봉 통일전선의 ‘운명’…좌우 외면 번번이 실패 미국 전략정보처(OSS) 훈련을 받는 광복군.


한독당은 그러나 미국과 따로 비밀리에 협상해 한독당계의 제2지대만 미국 전략정보처(OSS) 훈련을 받도록 했다. 한독당은 약산의 제1지대가 중국 남방에서 연합군의 상륙에 보조를 맞춰 활동하겠다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이 항복하는바람에 광복군은 침공작전을 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독당이 약산을 더 조기에 받아들여 김원봉이 군사 교섭ㆍ작전을 더 적극적으로 벌이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광복군은 일찌감치 임정 휘하에 소속돼 미국 OSS의 훈련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가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우리민족이 더 해방을 자랑스럽게 맞이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자료)
염인호, 김원봉 연구, 창작과비평사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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