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충남 서천에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사찰터와 건물지, 가마, 기와 등 유구가 대단위로 발견됐다.
(재)국강고고학연구소가 지난해 3월부터 조사 중인 충남 서천 종천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부지' 내에서 발견된 유적이다. 연구소 이번 유적에 대한 현장설명회를 11일 오후 2시 개최한다.
이번 유적에서는 특히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유구층에서 각각 ‘운갑사 (雲岬寺)’, ‘개복사(開福寺)’ 명문이 찍힌 기와가 출토돼 눈길을 끈다. 이들 사찰은 현재 문헌상으로는 찾아볼 수 없어, 당시 운영됐다가 역사에서 사라진 폐사지(廢寺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학술자료로 주목된다. 사역(寺域) 외곽에서는 백제 토기·기와 가마, 주조유구(鑄造遺構, 청동이나 철을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종(鐘) 등을 만들던 시설), 통일신라~조선 시대에 이르는 기와·도기·자기·숯가마 등의 유구도 발견되었다. 연구소는 "사찰과 사역 내 건물 조성을 위한 주변 생산유적을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백제 시대 건물지는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명확하지 않지만, 축조 방법과 연화문 수막새 등의 출토유물 등으로 미루어 관청(官廳), 객관(客館), 제의(祭儀), 사원(寺院) 등의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가 멸망하면서 초기 건물의 기능은 상실되었다가, 통일신라 하대에 백제 시대 건물지의 대지와 축선을 활용한 운갑사가 창건되었고, 고려 시대에 개복사로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성격의 건물로 변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 시대 건물지는 가로 3칸 세로 2칸의 상돈(주춧돌의 기초인 적심을 흙으로 켜켜이 순차적으로 다져서 만듦) 건물지로 밝혀졌다. 이후 이 건물지를 포함한 보다 넓은 면적을 네모난 모양으로 파낸 다음 여러 겹으로 흙을 다져 기단을 만들었으며, 그 외곽을 둘러싼 띠 모양의 기단을 다시 조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하굴식의 등요(登窯, 토기, 자기를 굽기 위하여 언덕 경사면에 터널형으로 길게 설치한 오름가마)인 백제 시대의 토기가마 2기가 나란히 확인됐다. 특히, 서편에 위치한 2호 토기가마는 길이가 약 17.75m에 달한다. 백제 시대로 추정되는 주조유구는 바닥에 선(線)문양의 수키와 2매를 연결시켜 만든 배출구와 지름 90㎝ 정도의 주형틀 흔적이 남아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서면 건물지 등 대부분의 시설이 백제 시대 유구를 그대로 개축한 관계로, 건물 축선과 배치가 백제 시대와 일치한다. 통일신라 유구는 계단식 축대시설과 출입시설, 항축유구, 배수로, 초석, 적심시설과 함께 ‘회창오년 운갑사(會昌五年, 雲岬寺)’ 명문기와와 석조 불상의 불두편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운갑사 건물로 짐작된다. ‘회창(會昌)’은 당나라 무종(武宗)의 연호로, 회창오년은 845년을 뜻한다.
고려 시대에는 이전 시기의 유구를 삭토(削土, 깎아냄)·복토(覆土, 흙으로 덮음)한 후 조성해 건물의 중심 축선이 바뀌게 된다. 특히 고려 후기 유구는 고려 전기 유구를 전체적으로 복토한 다음 새로운 배치와 축선으로 축조됐다. 사역 외곽에는 ‘ㄷ’형태로 담장을, 중앙에는 건물을 세웠다. 사역 내부에서는 중정(中庭, 집 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과 행랑채 건물, 측면 건물 등이 확인됐으며, 소조 불상과 ‘개복사(開福寺)’ 명문기와 등의 유물이 나왔다. 조선 시대 유구는 고려 시대 시설을 그대로 활용했으며, 보도시설과 기단석렬, 초석 건물지, 출입시설, 담장열 등이 발견됐다. 석조 불상편을 담장 재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는 사찰이 아닌 다른 시설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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