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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피서산장과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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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피서산장과 열하일기 전필수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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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푹푹 찌는 무더위에 '피서객'들이 늘고 있다. 산과 바다로 떠나는 것은 기본, 해외로 가는 인원도 많아 공항도 북새통이다. 이 같은 피서 문화는 비단 현대인의 산물만은 아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중국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인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熱河)'로 가는 여정을 적은 기행문이다. 1780년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건륭제)의 생일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베이징(北京)을 방문한다. 하지만 건륭제는 더위를 피해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고, 사절단은 다시 황제를 만나기 위해 열하로 갔다.

이 4개월여의 여정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당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당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복속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랑캐라며 무시를 하고 있었다. 망한 지 백 수십 년 된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며 중화의 전통은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소중화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실상은 청나라 문물이 우리보다 앞서 있고 배워야 한다는 연암의 열하일기는 청나라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北學)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북학파들이 부국강병책으로 제창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용거(用車)와 용벽(用?)을 들 수 있다. '용거'는 가난의 원인을 유통ㆍ교류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한 데 있다고 보고 수레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벽'은 주택ㆍ성곽ㆍ누대ㆍ분묘ㆍ창고 등 토목 건축에 광범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벽돌 제작을 위해 조벽 기술(造技術)을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이 같은 용거와 용벽은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그 효용성을 극찬했던 일들이다. 연암은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이를 직접 실천하기도 했다. 각종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해 사용하게 했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박지원이 찾아간 열하의 피서산장은 황제의 여름별장이기도 했지만 수십 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청나라의 제2의 수도 역할을 한 곳이기도 했다. 농경지대와 유목지대의 접경지대에 있는 이곳에서 만주족과 한족 외에도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청 제국을 구성하는 주요 이민족, 특히 유목민족들의 대소사를 챙겼다. 피서산장의 현판에는 한자 외에도 만주, 몽골, 티베트, 위구르 문자로 병기돼 있다.


각자의 부국강병을 꿈꾸던 건륭과 연암의 피서산장에서 만남을 상상하면서 올 여름휴가를 시작했다.
   






전필수 증권부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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