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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의병과 소액주주

시계아이콘읽는 시간52초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왕이다. 반정으로 쫓겨나 연산군과 함께 스물일곱 명의 조선 왕 중 '유이'하게 '묘호'를 받지 못했다. 자연스레 초기 평가는 각박했다. 이복동생을 죽이고, 계모를 유폐시켜 천륜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임진왜란 직후 전후 복구와 중국의 명ㆍ청 교체기의 실리외교에 대해선 인정을 받았지만 말기 잦은 '옥사'와 궁궐 중건으로 인한 내치 실패로 폭군의 이미지가 강했다.


이랬던 광해군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특히 몇 해 전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광해'는 폭군 광해군의 이미지를 백성의 삶을 최고로 여기는 명군으로 바꾸었다. 올해도 공중파 방송에서 드라마로 방영할 정도로 광해군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히 높다.

실제 광해군은 유능했다. 왕인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가 명나라에 망명을 타진할 때 분조(分朝ㆍ조정의 분소)를 이끌고, 평안도와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하지만 이런 공로도 그의 세자 지위를 공고히 해 주지 못했다. 광해군은 적장자가 아니었다. 서자였던 데다 그나마 장자도 아닌 둘째였다. 형도 있었고, 나중에는 적자인 동생도 태어났다.

전쟁 때 함께 싸운 명나라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형과 적자 동생을 핑계로 세자 책봉을 미뤘다. 당시 명나라도 황제(만력제)가 첫째보다 셋째를 총애하면서 후계 문제가 논란이었던 탓이다.


이런 악재들을 헤치고 왕이 된 광해군은 전후 복구사업과 대동법의 실시 등으로 민생 안정에 힘써 성과를 냈다. 하지만 세자 시절부터 계속된 왕권에 대한 위협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어린 동생(영창대군)을 왕권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 죽이고, 계모(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에서 반대파들에게 강력한 명분이 되기도 했다.


국내 최대그룹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 외국계 헤지펀드라는 예기치 않은 복병에 막판 혼쭐이 나긴 했지만 국내 기관들과 소액주주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처럼 삼성과 이 부회장에게 힘을 보탰다. 이 덕에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그룹을 지배할 지분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를 지지한 주주들을 위해 삼성의 후계자다운 실적을 올리는 일이다.






전필수 증권부장 phils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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