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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사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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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사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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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냐"는 명대사에 가렸지만 "대한민국 형사들은 두 발로 수사를 한다"는 대사도 실은 '금메달감'이다. 한국인이 뽑은 최고의 '한국영화 1위'이자 네이버 네티즌 평점 9.34에 빛나는 '살인의 추억'이다. 시골 형사로 분한 송강호는 저 대사를 통해 범인을 쫓는 '두 발'의 근성과 기질을 찬양했고 관객들은 단단히 감복했으니 역시 송강호다. 그의 명 연기, 명 대사를 텍스트로 옮기면 이렇다(반드시 송강호 톤으로 읽어야 맛깔스럽다).


"미국은 말이야 FBI라고 있어, FBI. 걔들 수사하는 것을 보면 말야 머리가 반짝반짝 돌아가. 땅덩어리가 어마어마하거든. 머리를 안 굴리면 그 큰 땅덩어리가 커버가 안돼. 그런데 대한민국은 말이야 두 발로 몇 발짝 뛰다 보면 다 밟혀. 땅덩어리가 요만하거든. 그러니깐 옛말에 대한민국 형사들은 두 발로 수사를 한다, 이런 말이 있는거야."

수사 기법이 열악했던 1980년대 '감'과 '깡'에 의존해야 하는 노곤한 상황을 빗댄 것이지만 그새 세월이 많이 변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치안은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고 촘촘하다. 골목마다 설치된 CCTV는 대중의 동선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길거리 불심검문은 주민등록번호를 수시로 까발린다. 동네 미장원에서는 새로 이사온 주민의 신상정보가 털리고 산속에 움막을 치면 며칠 못가 눈에 띄는 곳이 또한 대한민국이다. 미궁의 인물과 사건이 존재하기 어려운 휴먼 네트워크 집약 사회.


이런 사회에서 두 발도 아닌 두 눈으로 범인(犯人)은 물론 범인(凡人)의 행적까지 들춰보는 불법적인 시도가 있었다는 의혹으로 온통 시끄럽다.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 해킹 업체로부터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해 일반인들을 사찰(査察)했고 이 과정에서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이 매개체로 활용됐다는 시나리오다.


데자뷔다. 1년 전에도 정부의 카톡 사찰 논란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때 그 일이 '텔레그램 망명'으로 이어졌다면 이번에는 제2탄 '아이폰 망명'이다. 해킹 프로그램이 아이폰을 뚫지 못한다고 알려지면서 "국정원의 사찰을 피하려면 삼성 갤럭시가 아닌 애플 아이폰을 써야 한다"는 농담이 저잣거리를 우울하게 떠돌고 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겠지만, 또는 유야무야 묻히겠지만 이 순간 머리에 또렷이 남는 것은 송강호의 '두 다리'와 국정원의 '두 눈'이다. 전자가 '공공의 적'을 겨냥했다면 후자는 '공공의 안녕'을 위협한다. 전자가 감동적이었다면 후자는 경악스럽다. 무엇보다 전자는 영화이지만 후자는 현실이다. 떨쳐버리고 싶은 '사찰의 추억'이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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