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주기 맞았어도 우린 달라지지 않았다<1> 4·16, 가시지 않는 슬픔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지난 12일 찾아간 인천 앞 바다는 차갑고 무심했다. 1년 전 476명의 승객들이 세월호에 몸을 싣고 제주도로 가던 그때와 똑 같았다. 아직은 봄을 허락치 않는 차가운 바다 위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갈매기가 허공을 떠돌고, 희뿌연 바닷물은 잔잔한 파도를 만들어 내며 무심한 듯 맴돌았다.
바다만 1년 전 그대로일까. 세월호 참극은 전 사회적으로 안전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이날 타 본 월미도~영종도간 카페리 여객선에서는 안전 불감증이 여전했다. 고박 장치는 여전히 부실했고, 탑승객 신원 확인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여객선터미널에 붙여져 있는 안전 법규 안내 포스터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정확히 되짚어 보자. 지난해 4월16일 오전 전남 진도군 앞 바다에서 청해진해운 소속 6800t급 인천~제주간 카페리 여객선 '세월호'가 원인 미상의 급선회로 중심을 잃고 침몰했다. 이 배에는 안산 단원고 학생 245명을 포함해 476명이 타고 있었다.
구조당국은 처음엔 바다가 잔잔하고 배가 커 신속히 구조하면 별다른 피해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오전 11시 쯤에는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오후 들어 승객 476명 중 구조된 사람은 172명에 불과하며 나머지 304명은 배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배에 갇힌 이들은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했고, 9명은 아직도 실종 상태다.
선내 구조를 잘 알고 있었던 선장과 선원들은 구조 활동은 커녕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만 내린 채 먼저 탈출해버렸다. 선사는 돈에 눈이 어두워 한계 중량을 뛰어넘는 화물을 싣고서도 제대로 고정시키지도 않은 채 배를 출발시켰다. 구조 훈련도 한 번 안 받고 현장에 출동한 해경 구조선은 퇴선 명령도 선내 진입도 시도하지 못했다. 사고 해역을 감시하던 진도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는 그 순간 '눈 먼 봉사'였다.
사고 발생 7시간 후 나타나 "아이들이 구명복을 입었다는 데 그렇게 찾기 힘드냐"고 말한 박근혜 대통령은 이후 두고 두고 리더십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사고 초기 "별 일 있겠냐"던 정부와 구조 당국의 안일한 초기 대응 또한 거센 역풍을 맞았다. '전원 구조'라는 사상 최악의 오보를 낸 언론들, 유족들을 향해 패륜적 행동을 일삼은 '일간베스트' 회원 등도 한국 사회의 미성숙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후에도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다'던 대한민국호는 그러나 세월호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돌고 있을 뿐이다.
한쪽에선 대통령과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한쪽에선 '지긋지긋하다'며 세월호를 정치적 시빗거리로 치부한다. 세월호진상조사특별위원회도 시행령안을 둘러 싼 갈등으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유족들은 진도 팽목항과 안산 단원고, 국회, 광화문 등 1641㎞를 눈물로 행진하며 진상규명을 호소하고 있다.
1년을 맞은 세월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 치유하고 극복하고 설득하고 화해하고 점검하고 뜯어 고쳐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 방향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수백명의 안타까운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무엇보다 희생자 유가족들이 절절하게 호소하는 것처럼 '잊혀지는 것'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진상규명이나 재발방지 등에 대한 면밀하고도 철저한 검증 없이 흐지부지 잊혀지는 것은 희생자와 유가족을 다시한번 욕보이는 것이요, 사회 전체를 퇴보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각 분야의 책임있는 이들이 '세월호를 기억시키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세월호 1년을 맞아 광장에서, 팽목항에서, 단원고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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