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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내가 샤를리다'의 의미(253)

시계아이콘읽는 시간48초

프랑스 테러사건에 대해 논평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들 중에는, 만평신문 샤를리 엡도가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부당한 조롱과 모욕을 가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언론의 부당함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었다고 굳이 말하기는 부담스럽기에,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는 듯한 어떤 칼럼을 읽었습니다. 프랑스가 견지해온 다양성에 대한 관용(톨레랑스)이, 정체성의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극우적 폐쇄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섞더군요. "내가 샤를리다"라는 글을 써서 들고 있는 시민들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나는 테러리즘에 반대한다"가 아니라 "나도 샤를리의 논조에 동의한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해석하니, 프랑스 시민들이 참 옹졸해보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해석이 오히려 옹졸하고 그 해석의 틀이 편협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시민들이 나선 것은, 언론사에 침입하여 자신들을 비판한 기자를 총으로 쏴죽인, 그 '날것의 증오'와 '피의 복수'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관용이란 상식이 서로 유통되는 환경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언론사를 테러하는 일이 이 나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 나라 국민들은 수치스럽게 생각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 테러의 주체가 무슬림이 아니라, 골수 프랑스인이라 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내가 샤를리다, 내가 언론이다, 나를 쏴라, 나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나섰을 것이라 믿습니다. 언론의 비판과 풍자에 대한 '관용'이 허용되는 까닭은, 이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샤를리 엡도의 풍자 내용에 대해 호감을 갖거나 그들의 의견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언론사의 기자들을 응징하는 테러를 비판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듣기 싫은 말을 제압하고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폭력과 강제를 동원하는 일이, 열린 사회의 가장 위험한 적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비판하는 자의 저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나는 목숨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고 말한, 어느 지식인의 말을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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