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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넘어 내가 살 곳은 히말라야···그 꿈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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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넘어 내가 살 곳은 히말라야···그 꿈을 찍었다" 사진가 이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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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 사진전' 연 이창수 작가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인도 대륙 북부에서 중앙아시아 고원 남쪽까지 동서로 길게 가로지르는 지구상 가장 거대한 산맥, 히말라야(Himalayas). 이곳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8848m)을 비롯해 대다수의 8000m급 봉우리들이 자리한다. 설산의 장엄한 광경을 목격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많은 산악인들이 목숨까지 내걸고 도전하는 곳이다.


해발 4000~5000m 위치에 있는 히말라야 곳곳의 베이스캠프는 일반인이 갈 수 있는 마지막 장소다. 사진작가 이창수씨(54)는 이곳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00m)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음 짓고 있었다. 두 겹의 모자와 털 달린 두터운 점퍼를 입은 그의 오른편엔 오색 천에 티벳 불교경전의 글이 빽빽하게 새겨진 깃발 '룽다(wind horse)'가 보인다. '바람의 말'로 풀이되는 룽다는 부처님의 진리가 바람을 타고 온 세상에 퍼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창수 작가는 지난 2011년 말부터 지난해 말까지 2년 남짓 되는 기간 동안 총 아홉 차례 히말라야를 찾았다. 그는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칸첸중가', '마나슬로' 등 히말라야의 14개의 최고봉 베이스캠프를 돌았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28일부터 '히말라야 14좌 사진전-이창수ㆍ 영원한 찰나'(예술의전당)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27일 전화인터뷰를 통해 만난 작가는 "마흔까지는 서울에서, 예순까지는 지리산에서 그리고 그 이후엔 히말라야에서 살아보는 게 내 꿈이었다"며 "지금까지 설정해 온 방향대로 잘 가고 있고, 예순 이후의 삶을 그리며 히말라야를 찾게 됐다"고 했다.


이 작가는 서울에서 16년 동안의 언론사 사진기자의 생활을 마감하고 마흔이 되던 2000년 녹차재배 농사꾼으로 제 2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지리산 자락 하동 악양에 정착했다. 농사일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될 즈음 지역민 대상으로 문화예술 교육을 하고 있는 '지리산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히말라야에서의 삶을 꿈꾸게 된 건 23년 전 히말라야에 처음 갔을 때의 추억 때문이었다. 그는 히말라야 트레킹 지역인 네팔 룸비니에서 우리나라 사찰을 발견했고, 단청을 하는 스님을 만났다. 그는 "그 때 나이가 더 들면 스님을 도우며 이곳에서 단순한 일에 빠져 살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자연, 사람 그리고 단순함'. 작가의 인생 궤적을 만들어 온 것들이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히말라야의 압도적인 위용보다 이곳에 거주하며 여행객들의 짐을 들어주며 길을 안내하는 포터(porter)들, 설산의 밤과 아침 풍경, 고봉을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모습들이 가득하다.


히말라야는 작가의 심상에도 새로운 깨달음을 줬다. "낮에는 눈이 녹거나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어 주로 밤에 걸었어요. 봉우리를 제대로 찍을 수 있는 장소로 가려면 베이스캠프 말고도 조금 더 올라가야 할 때가 있었죠. 랜턴 불빛만 보고 올라가는데 로프를 놓치면 거의 죽음이죠. 높은 데로 가니까 숨쉬기가 힘들고, 들숨 날숨에 맞춰 왼발 오른발을 맞춰 갔죠. 여정의 초반이었는데 그때 생각했어요. 걷기와 호흡의 소중함을."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성스러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언젠가 움막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나무를 하고 온 주인 할아버지가 밤늦게 돌아와 모닥불 온기를 쬐고 있는 모습을 봤죠. 맨발에 눈을 감고 벽에 기대 불을 쪼이는 그의 모습은 평온하면서도 그윽했죠."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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