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단어 하나를 꼬투리 잡을 생각은 없었지만 '개조(改造)'라는 단어는 두렵다. 많고 많은 비슷한 낱말 중 굳이 '개조'를 선택한 속뜻을 되새겨보려 하면 할수록 두려움과 함께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우리 국민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한낱 개조돼야 할 인간으로 전락했다는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개조하려는 것이 국민과 그 국민 하나하나가 가진 인간성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대신 국가를 이루는 3요소 중 주권, 즉 정부를 바꾸겠다는 뜻이라 믿고 싶다. 그렇다면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행정부를 개혁대상으로 삼고, 조만간 발표할 대국민담화의 제목도 국가개조에서 정부개조로 바꿔주기 바란다.
이것이 괜한 오해가 아닌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와 우리 선배들은 인간개조ㆍ정신개조ㆍ국민성개조란 단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던 시대를 암울하게 기억하고 있다. 타율과 감시, 처벌로 점철된 개조의 끝자락에서 어쩌면 세월호는 침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모든 것을 원점에서 국가개조를 한다는 자세로…"라며 이 단어를 처음 꺼냈다. 3일 뒤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단단히 마음을 잡고 개조하는 데 모든 힘을 쏟겠다"고 다시 강조했다.
청와대 주도의 획기적이며 강제적이고 권위적인 어떤 조치가 이어질 것이란 낌새는 사회 전반에 이미 퍼져있다.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화두로 던지자 말단 공무원 보고서에도 '창조' 두 글자 넣지 않으면 분위기 파악 못하는 시대가 된 것처럼, 합의를 통한 변화나 통합과 진화 같은 개념보다는 개조 아니면 타도해야 할 '암덩어리들'을 서로 밀고하고 쳐부수는 섬뜩한 분위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속에서 일부 과격 세력은 세월호 사고를 지렛대 삼아 대통령 하야 운운하며 정권을 개조하려 든다. 이에 대한 정권의 대응법은 그들을 적폐(積弊)로 몰아 응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악다구니 싸움은 아무런 발전적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우리 모두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최소한 이런 모습은 아닐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부흥ㆍ중흥ㆍ적폐ㆍ개조와 같은 심상치 않은 단어들을 선호하는 것은 부친 시대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언어 습관일 뿐 그 단어에서 한국인이 떠올리는 어떤 부정적 통치철학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니라 믿고 싶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5천년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라고 썼다. 이런 역사인식 위에서 시행된 타율적 국가개조는 또 다른 영역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과 역사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개조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흔쾌히 몸을 던짐으로써 거스를 수 없게 형성되는 어떤 도도한 흐름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개조와 같은 것이라면 곧 나온다는 다섯 번째 대국민사과도 성공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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