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대응에서 드러난 문제는 과거로부터 비롯" 인식
現 정권 책임론 선긋고 '국가개조' 추진할 명분 획득
'적폐론' 지지 얻느냐 따라 지방선거·국정동력 좌우될 듯
[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적폐를 도려낸다.' 박근혜 대통령은 29일 세월호 피해자 합동분향소 방문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적폐'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했다. 한자로 '積弊',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이란 설명을 굳이 덧붙여야 하는 이 어려운 단어에는 박 대통령이 가진 쉽지 않은 고민이 숨어 있다. 일단 박 대통령은 낯선 단어 하나를 '툭' 던짐으로써 일차적으로 국민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
박 대통령은 합동분향소에서 희생자 가족들과 대화한 10여분 동안 딱 두 번 완성된 문장으로 말했다. 하나는 박준우 정무수석을 현장에 남겨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였고 나머지는 바로 "그동안 쌓여온 모든 적폐를 도려내겠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박 대통령을 둘러싸고 정신없이 애원과 호소를 쏟아내는 상황에서도 던져야 할 메시지는 분명히 던진 것이다. 이어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박 대통령은 "과거로부터 겹겹이 쌓여온 잘못된 적폐들을 바로 잡지 못하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너무도 한스럽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사회가 방치해온 안일함 즉 원칙을 무시하며 과정보다는 결과를 우선하고, 내실보다는 속도와 성장에 치중했던 가치관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결과물이라는 데 많은 국민들이 동의한다. 초동대응 실패도 관계 기관들이 그동안 쌓아온 것의 발로이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무능력은 아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분노가 청와대를 향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겠다는 게 박 대통령의 의도로 보인다. '취임 14개월 된 현직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다'며 선을 그으려는 뜻에서 나온 단어가 적폐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29일 대국민사과를 내놨으나 '잘못을 통감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적폐 도려내기'는 박 대통령이 취임 후 강조해온 '비정상의 정상화'와 궤를 같이 한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를 '온전히 과거의 잘못'이라 규정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를 지렛대 삼아 '비정상의 정상화'보다 더 공격적인 의미로서 '국가개조'에 착수할 힘을 얻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박 대통령이 국가개조의 중심에 관료개혁을 놓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공무원 연금 등 특수연금에 대한 개혁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개조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식은 세월호 구조작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잡힐 것이지만, 6월4일 있을 지방선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예고된 대로 국무총리를 포함한 내각총사퇴, 국민안전마스터플랜 발표 등은 지방선거 이전에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의견, 국가개조의 비전 등을 담은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기로 하고 그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밝혔다.
일련의 작업을 '선거용 전략'이라 폄하할 수 있으나, 지방선거에서 완패할 경우 국정운영 동력이 급속히 약화될 것이기 때문에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세월호라는 뜻밖의 암초를 만난 박 대통령이 적폐를 도려내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지 혹은 현 정부 자체가 적폐의 마지막 일부로 낙인 찍혀 서서히 침몰할 것인지는 세월호 구조작업의 성과, 현 정부가 내놓을 후속 대책의 정밀함, 6ㆍ4 지방선거 그리고 국민의 현명한 판단에 달려있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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