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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술을 사려면 치마를 풀어야하고(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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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7)


[千日野話]술을 사려면 치마를 풀어야하고(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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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두 사람은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앉았다. 이황이 말했다.


"문득 고려 백운거사(이규보)가 평양 기생에게 준 시가 생각나는구료."

"어떤 것인지요?"


"진주(眞珠)라는 예명을 가진 여인에게 준 것이었지요. 국색시명세진지(國色詩名世盡知) 무유회명낭상사(無由會面浪相思). 고려 최고의 미녀인 데다 시인 명성까지 높은 것을 세상이 다 아네, 까닭도 없이 얼굴만 봐도 그리운 생각이 파도를 치네. 일언감희환감한(一言堪喜還堪恨) 오파문장당혁기(誤把文章當奕?). 말 한마디에 주체 못할 기쁨이 도리어 주체 못할 회한으로 바뀌네. 문장을 배운 것이 잘못이로다, 차라리 바둑을 배웠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아아. 아름다운 여인 소객(騷客ㆍ시인)이었군요. 뛰어난 백운거사께서 시 한 줄에 탄식할 만큼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재능을 갖춘 여인이 부럽습니다."


"그대가 평양의 진주 못잖게 뛰어나다는 말을 하고 싶었네."


"저의 문장이나 용모나 모두 거기에는 반도 못 미칠 만큼 둔하고 평범한데 나으리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를 격려하시려는 뜻일 것입니다."


"아니다. 너에게는 다른 여인에겐 없는 뛰어난 기품과 매력이 있느니라."


"고려시인을 말씀하시니, 팽원(평안도 안주의 옛이름)의 기생이었던 동인홍(動人紅ㆍ사람을 감동시키는 꽃이란 뜻이다)의 대담한 시가 떠올랐습니다."


두향이 읊는다.


"창녀여량가(倡女與良家) 기심간기하(其心間幾何). 기생과 보통 여자, 그 마음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가련백주절(可憐栢舟節) 자서사미타(自誓死靡他). 가련하다 백주의 절개(시경에 나오는 정절의 상징)여, 맹세하기를 죽어도 딴 남자는 싫다 하였네."


"아, 동인홍을 알고 있었구료. 그래, 참으로 기개 높은 여인이었지. 병마분도사가 태수와 장기를 두는데, 태수가 너무 취해서 둘 수 없게 되자, 여인이 직접 덤벼들어 구원하러 나섰다오. 그러면서 시를 읊었는데 이러했지.


태수분영일국기(太守分營一局棋)
몽부지생사(夢不知生死).


태수께서 편을 갈라 장기 한 판을 두시는데,
살지 죽을지 꿈에도 알 수 없도다.


행봉진유회(幸逢溱洧會)
작약증여하(芍藥贈如何).


남자와 여자가 다행히 만났으니
포를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아주 교묘하게 하고 있지. 진유(溱洧)는 시경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의 은유라오. 그러니까 자신과 대국하게 된 것을 말하는 듯하면서, 흥정을 하는 것이지. 작약(芍藥) 역시 시경의 그 시에 나오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작약(炸藥) 즉 포(包)를 가리키지.


매주나상해(買酒羅裳解)
소군옥수요(召君玉手搖).


그쪽에서 장군을 부르고 싶으면 상을 풀면 될 것이지만
그러면 제가 장을 부르면서 궁에 들어가 왼쪽 아래를 치겠습니다.


주(酒=主)를 사고 싶으면 상(裳=象)을 풀어야 하고 그러면 장(君=將)을 부르면서 옥수(玉手=궁의 王자의 왼쪽 아래 점)를 흔들겠습니다.


장기판을 주무르고 있는, 뛰어난 전략가 여인이 보이지 않는가."


"시 한 편 속에 긴장된 전쟁이 벌어지고 있군요. 대단한 여인입니다. 나으리." <계속>


▶빈섬의 스토리텔링 '千日野話' 전체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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