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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단양 제8경은 잠대문향(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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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4)


[千日野話]단양 제8경은 잠대문향(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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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생겨나서 문득 알아버린 이 사랑
차라리 몰랐다면 무심히 피었다 졌을걸
강선대 강가에서 이호대를 돌아보며
이요루 난간에서 단구동천 헤아리며
지금부터 1천년 한 사람을 바라보리
두보 향기 꽃바람 되어 강선대를 감돌리
매화 꽃술은 이미 터져버렸지만
매화 꽃잎은 다시 피지 않으리"


슬프고 애절한 시에 모두들 먹먹해 하는 기분이 되었다. 공서는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 것이 미안해져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고려시대 도은(陶隱ㆍ이숭인 1349-1392)의 시에 파사천수월황혼 일영유자일단혼(婆娑千樹月黃昏 一詠幽姿一斷魂)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달빛 어스름에 천 그루 매화가 춤추니/그 자태를 읊는 시 한 수마다 넋 하나씩 끊긴다는 뜻입니다. 매화가 흩날리는 모습이 나무 한 그루마다 한 수의 시와 같은데 그게 일제히 흔들리니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지요. 벗들의 춤에 두향의 거문고 소리가 닿으니, 숨을 멎게 하는 매화시처럼 아름답지 않을지요? 강선두향가는 인간사의 비창(悲愴)을 담고 있으나 강선대의 풍격(風格)에는 걸맞지 않을지요? 두보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즐길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를 슬퍼했듯,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슬픔에는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두향이 말했다.


"공서 어른께서 부연설명을 하지 않으셔도 그 경계가 이미 마음속에 아른거렸습니다. 과연 향기롭고 빛나는 언어들입니다."


퇴계도 말했다.


"지극한 아름다움과 지극한 슬픔이 통한다는 것에 깊은 감명이 있네. 강선대가 단양의 8절(八節)에 속할만함을 일깨워준 말씀이기도 하오. 그래. 두향은 어떤 제(題)를 떠올렸는지요?"


"저는 강선대의 먼 뒷날을 떠올렸습니다. 잠대문향(潛臺聞香)이라 부를까 합니다. 물에 잠긴 강선대에 향기가 들려온다는 뜻입니다. 잠대(潛臺)는 물에 비친 바위 그림자를 말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흘러 설령 이 바위가 물속에 잠겨도 한 사람에게 다가간 매화 향기는 영원할 것이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물속에 잠긴 매화꽃 그림자에게서 향기를 맡는 높고 그윽한 정신이야말로 강선대의 깊은 정취가 아닐까 합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과연, 두향이로고!" 이지함이 소리쳤다.


"강선대와 매화가 모두 물에 잠길지라도, 나 또한 그 매화의 향기를 잊지 않고 맡고 싶소이다."


토정의 말에 구옹도 흥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돋웠다.


"잠대(潛臺)라는 말속에, 공서가 말했던 '1천년 동안'이라는 뜻이 저절로 담겼으니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 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보다 더 영원한 시간을 생생하게 드러낸 묘리(妙理)는 강선대와 함께 오래 기억될 만한 시안(詩眼)이오."


다들 다시 신명이 나서 일제히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탁주 한 순배가 돌았고 단양 하늘과 강물엔 붉은 노을이 가득 피어올랐다. 마침내 퇴계가 이 고을에 온 뒤 가장 야심 차게 기획했던 단양팔경이 완성되었다. 일행은 돌아가며 한 번씩 그 칭명을 즐기며 잔을 들었다.


제1경은 사암풍병(舍巖楓屛ㆍ사인암)이요
제2경은 구로모담(龜老慕潭ㆍ구담)이라네
제3경은 삼도일하(三島一霞ㆍ도담삼봉)요
제4경은 석미신월(石眉新月ㆍ석문)이라네
제5경은 취암무천(醉巖舞天ㆍ선암)이요
제6경은 겸산공수(謙山恭水ㆍ쌍룡곡)라네
제7경은 여인여산(如人如山ㆍ와룡곡)이요
제8경은 잠대문향(潛臺聞香ㆍ강선대)이라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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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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