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영화 '한공주'로 국제영화제 8관왕 휩쓴 이수진 감독 인터뷰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작은 영화 한 편이 개봉도 전에 이토록 화제가 된 적이 있을까. 영화 '한공주' 이야기다. 스타급 배우가 출연하지도 않았고, 유명감독의 작품도 아닌, 개봉여부도 불투명했던 저예산 영화 '한공주'는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여 CGV무비꼴라쥬상과 시민평론가상을 받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어 제13회 마라케시국제영화제(모로코) 금별상, 제43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네덜란드) 타이거상, 제16회 도빌아시아영화제(프랑스)에서는 국제비평가상·관객상·심사위원상을 휩쓸었다. 이 긴 목록에 최근에는 '제28회 프리부르국제영화제(스위스) 대상 수상'이라는 한 줄을 추가했다.
'아빠' '적의 사과' 등 단편영화로 주목받았던 이수진 감독(37)은 '한공주'로 화려하게 장편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세계적인 거장 감독 마틴 스콜세지로부터 "미장센, 이미지, 사운드, 편집, 연기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내 나이에도 배울 점이 아직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이 감독은 "개봉여부도 불투명한 저예산 영화가 기댈 수 있는 것은 해외영화제 수상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한공주'는 2004년 밀양지역 고교생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다른 영화들과는 '분노의 끓는점'이 다르다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영화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관객들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이라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줄 것인가?"
▲ 성범죄 관련 영화들이 주로 복수극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성폭행이라는 소재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이런 이야기를 나까지 해야 할까하는 고민도 있었고. 성폭행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의 자살,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왕따문제 등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다가왔다. 다만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해 공분을 일으키게 할 게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소녀의 지독한 성장담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엔 피해자를 둘러싼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도 포함돼있다.
▲ 영화에서는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온 사회가 한공주에게 등을 돌린다. 가족, 학교, 친구들까지도 이 아이를 외면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물어보고 싶다. 누구나 멀리서보면 다 피해자를 보듬어주고 싶어하지만 그 간격이 좁아지면 좁아질수록 회피하고 싶어하지 않나. 신문이나 뉴스에서 사건을 접할 때 나 역시 굉장히 분노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내 주변에 있다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더니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분노가 너무 쉽고, 표피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지점에서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다.
▲ 해외영화제에서 이렇게 많은 상을 받게 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또 영화제 상영 당시 반응은 어땠나?
-예산이나 다른 여건 등을 감안했을 때 내가 멋진 미장센을 보여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에는 한계가 없지 않나. 주·조연에서부터 단역까지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조화로워야 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됐다. 또 영화를 찍으면서 단 한 컷도 허투루 찍지 않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설사 관객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쉽게 가고 싶지 않았다. 해외영화제에서는 나라마다 관객들의 반응이 다 달랐다. 스페인에서는 한 관객이 찾아와서 '법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을 주기도 했고, 모로코에서는 심각한 내용이 나오면 사람들이 소리를 꽥 질러댔다. 로테르담은 친절하고 따뜻했고.
▲ 한공주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숨통을 틔워주는 장면인데, 의도한 것인지?
-공주가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설정돼있는데, 이 부분도 너무 설정이 식상한 것 같아서 고민을 많이 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제발 이 아이가 음악으로 성공하지 말기를 바랐다"고 하더라.(웃음) 하지만 한공주의 과거와 현재의 달라진 감정 폭을 드러내줄 수 있는 건 역시 음악밖에 없더라. 또 혼자서 음악을 하던 공주가 전학을 와서 아카펠라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변하게 되는 부분도 보여주고 싶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
▲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는데, 등급을 낮춰서 청소년들이 더 많이 보게 할 생각은 안해봤나? 차기작은?
-재심의를 넣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시 편집을 해야 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청소년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다만 사람들이 선입견을 버리고 영화를 봐줬으면 좋겠다. 차기작은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그 때 생각해봐야겠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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