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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 몸사랑 하기 전에 맞절하는 남녀(36)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29초

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36)

[千日野話] 몸사랑 하기 전에 맞절하는 남녀(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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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잠자리는 어떠해야 하옵니까?"

"남자는 남자로서의 본성을 경(敬)의 마음으로 드러내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본성을 또한 경(敬)의 마음으로 드러내는 것이지."


"분방하게 즐기는 일은, 경(敬)이 아니옵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조물주가 분방하게 즐기도록 본성을 주지 않았느냐."


"소녀는 아직도 아리송하옵니다. 욕망하는 마음을 어디까지 내놓아야 할지 경계를 잡지 못할 듯합니다."


"저 매화가 추하게 느껴지거나 음탕하게 느껴지느냐?"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하지만 저 매화는 아무런 옷을 입지 않고 제 성기(性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형상이 아니더냐. 꽃잎이 바로 그것이다."


"하오나…. 그걸 아무도 성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사옵니다."


"그래. 매화는 저 꽃의 향기로 호접(胡蝶)을 불러야 하는 식물의 생을 살 수밖에 없단다. 꽃잎 속에 들어있는 화분(花粉)을 실어 날라줄 누군가가 필요한 거지. 꽃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은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어. 아름답고 향기로워야 다른 꽃보다 먼저 선택을 받을 수 있거든. 다른 꽃을 시기하고 경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물주가 저 꽃의 본성에다가 그 마음을 심어놓은 것이지. 열심히 사랑하면, 생명이 번성할 수 있고 세상이 번창할 수 있도록 해놓은 거지. 그게 높이고 아끼는 마음(敬)이며, 배려하는 마음(誠)이며 다른 존재와 합일하고자 하는 사랑(愛)의 본모습이다. 저 매화의 사랑을 배우기만 해도, 우린 순수하고 존귀하며 아름다운 합일의 예식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


"나으리의 말씀에는, 우주만물의 원리를 통찰하는 큰 눈이 있는 것 같아요."


"허허. 공감해주니 고마운 일이로다. 그럼 술상을 물리고, 매화 합방례(合房禮)를 치러볼까?"


"예, 알겠사옵니다. 나으리."


두향이 술상을 물리고 돌아왔을 때, 퇴계는 자리를 반듯하게 고르고 병풍 한쪽에 바른 몸가짐으로 서있다. 두향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남녀가 하나가 되는 예식만큼 신성하고 존귀한 것이 또 있겠느냐? 우리가 함께 하기 전에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나누는 예(禮)를 갖추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먼 불국(佛國)에서는 교합례(交合禮)를 치른다고 들었다. 상대를 아끼는 마음을 가만히 돋우는 일이니, 참으로 옳은 것이라 할 만하다. 너는 저쪽 자리에 서서, 맞절을 나누자꾸나."


"맞절이오?" 두향이 부끄러운 얼굴로 되묻자 퇴계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단다. 서로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제가 감히 사또의 절을 받다니, 그건 격(格)과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아니다, 아니다. 사랑을 하는 두 당사자로서 격과 분수는 동일해야 하지 않겠느냐?"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섰다. 정적 속에서 퇴계가 나직이 이렇게 고한다.


"퇴계와 두향, 두 사람은 오늘 성스러운 합방의 예를 치르고자 합니다. 귀한 인연을 지어주신 뜻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러면서 퇴계가 더욱 소리를 낮춰 읊조린다.


"뇌시아종화하간(賴是我從花下看), 이리하여 내가 몸을 낮춰 꽃밑에서 올려다보니"


그러자 두향도 따라서 읊는다.


"묘두일일견심래(昴頭一一見心來), 고개를 치켜든 꽃머리 하나하나마다 마음 다가오는 게 보이도다."


[千日野話] 몸사랑 하기 전에 맞절하는 남녀(36)

등불이 일렁거리는 가운데 서로를 향해 천천히 절을 한다. 이마가 땅에 닿은 채로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숙연한 공기가 그 사이에 흘렀다. 두향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까닭도 자세히 모를 기쁨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누운 채로 들키지 않으려고 가만히 흐느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 세상을 끝없이 아름답게 만든다는 걸 깨닫는다. 조선 땅의 천대받는 기생으로 자라나 일부종사(一夫從事) 하는 여염집의 규수를 마음속으로 깊이 부러워한 적도 있었지만, 이날만은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퇴계 앞에서 자신은 기생이 아니라, 오롯이 존중받는 여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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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침실의 道는 본성을 따르는 것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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