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에 소리없이 쓰러진다...위기는 축소되고 은폐된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영국 국내총생산(GDP)은 장기적으로는 1% 수준에 머물 것이다.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표준이라고 느껴졌던 2.5% 성장세를 찾기 힘들게 될 것이다."(영국경제연구소(IEA) 보고서 중)
"유로존은 저성장에서 탈피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경쟁력을 상실했다."(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국제경제학 교수의 가디언지 기고문 중)
"신흥국들의 경제 위기로 인해 장기간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는 대감속(Great Deceleration)이 일어나 세계 경제는 성장률 3%도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중)
'성장의 시대'가 끝났다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 이후부터다. 세계 곳곳에 어둡게 드리워진 '저성장'의 그림자를 두고 일본 시가대학교의 시바야마 게이타 경제학부 교수는 '조용한 대공황'이라고 정의한다.
경제 부문에서의 혼란이 각국의 정치와 사회,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 마치 1930년대의 대공황 시대와 유사하다는 뜻에서다. 다만 각 정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같은 상황을 은폐ㆍ축소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제위기는 '조용하게', 그러나 더욱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신간 '조용한 대공황'은 현재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세계화를 지목한다. 1980년대 일본의 부동산 버블로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입은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급속한 세계화가 진행된 이후인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가 발생하자 전 세계가 휘청거렸다. 미국의 전체 주택융자 잔액 가운데 서브프라임 대출 잔액은 겨우 20% 정도에 불과했는데도 왜 위기는 이렇게 급속히 전염됐을까. 어느 한 곳의 고리가 취약해지면 그 여파가 전지구적으로 퍼져나가는 '재앙 도미노',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대표적인 폐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흥미로우면서도 무시무시한 부분은 1930년대 대공황과 지금의 '조용한 대공황' 간의 평행이론이다. 제1차 세계화 시대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버블이 부풀었다가 꺼지면서 공황이 세계적으로 번져 나갔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된 버블 붕괴가 유럽으로 불똥이 튀면서 한층 더 심각해진 양상도 유사하다. 세계 각국에서 정부의 경제 개입을 꺼리는 자유방임이 시대적 조류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번 금융위기의 끝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끝을 맺고 말았던 제1차 세계화의 종말과 어떻게 다를까. 혹은 얼마나 같을까.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폭동과 국가 붕괴는 후속되는 새로운 지정학적 대립의 서곡이 될 것이다. 앞으로 유럽 위기가 심각해지고, 그 충격이 아시아 등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면 위기는 더 한층 복잡해진다...(중략) 확실한 것은 지난 20년 동안 지속된 평화와 번영이 다가오는 20년 동안에도 계속된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57p)
여기서의 대립과 전쟁은 단지 물리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경제위기가 지속되면 각국은 자국 경제 보호주의에 앞장설 수밖에 없다. 일본의 '엔저 정책', 우리나라의 '고환율 정책', 중국과 미국의 '보호 무역주의'가 충돌하면서 이미 우리는 경제전쟁에 돌입했다. 모든 나라가 통화정책을 통한 수출확대에 나서게 되면 국가 간 정치ㆍ경제 분쟁이 늘어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역간ㆍ개인간 격차는 더욱 확대된다.
시바야마 게이타 교수는 우리가 나아갈 길은 '국가 자본주의'가 아닌 '국민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국가 자본주의'는 2010년 미국의 정치학자인 이안 브레머가 정의한 것으로, 경제모델을 정부가 지도하는 자본주의를 뜻한다. 예전에는 다국적 기업이 국가의 틀을 넘어 세계 시장을 주도했다면, 현재는 신흥국의 정부 보유 기업이나 정부가 지배하는 기업이 세계 경제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현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국가 자본주의'는 상당수 국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저자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투자에 의해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본을 늘려 나가는 운동"이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인간 관계 및 조직의 신뢰와 같은, 즉 반드시 화폐로 환산될 수 없는 무형의 자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것"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가족과 공동체를 재생시켜 나가면서 도시와 지방, 다양한 산업 간의 균형도 도모해 나가면서 '국민 자본주의'로 체질을 개편하자는 것이다.
'조용한 대공황'은 우리에게 닥쳐 온 지금의 위기를 경제, 정치, 사상사를 곁들이면서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특히 '아베노믹스'의 위험성을 주장한 저자가 한국에 대해서 내놓은 섬뜩한 경고는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높은 가계부채는 앞으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계속 확대된 소득 격차와 지역 간 격차를 줄이기에는 한국 정부의 지출 규모가 너무 작다. 일본 이상으로 무역 의존도와 시장 개방도가 높은 한국은 글로벌 경제의 혼란으로 발생하는 악영향을 일본 이상으로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되어 있다."
(조용한 대공황 / 시바야마 게이타 /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1만2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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