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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아침]어린이의 영원한 '대부'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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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아침]어린이의 영원한 '대부' 방정환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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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소파 방정환은 이같이 유언을 남겼답니다. 1931년 오늘은 어린이 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요즘에야 당연시 되는 '어린이'라는 말은 그에 의해 공식적인 단어가 됐습니다. '늙은이', '젊은이'와 함께 '어린이'가 공식화 됐다는 것은 그 사회의 미래를 이끌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일제 식민지 하에 있던 당시로서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미래의 빛 즉, 광복을 암시하기도 한 것이죠.


서울에서 어물전, 미곡상을 운영해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난 방정환은 8세가 되던해부터 갑자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가난과 싸우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보통학교와 상고를 졸업한 그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 필사일을 하면서 독학을 합니다. 그러다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딸과 결혼하면서 그 일을 그만 두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이후 천도교의 도움을 받으며 청년문화운동을 적극 펼쳐나갑니다. '북극성'이라는 필명으로 번역을 하였으며 또래들로 구성된 '경성청년구락부'라는 비밀클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돌리다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1923년에는 국내 최초의 순수 아동 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죠. 그해 5월 1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어린이날을 만들어 기념합니다. 5월 1일로 정한 것은 그날이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일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어린이 날은 일본의 탄압을 받던 '노동절'과 겹치는 문제로 5월 첫 일요일로 변경됩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한동안 어린이 날 기념식을 열지 못하다 해방 후인 1946년 5월 5일 부활했습니다. 이후 5월 5일로 고정됐는데 이유는 첫 해 5월 첫 일요일이 5월 5일 이었기 때문입니다.


방정환은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7월 23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린이가 살아 있는 한 그는 영원한 그들의 대부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itb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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