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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 탄생 227주년'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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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노상래]


용훈 스님과 제자들 음식 바쳐…무형문화재 등재 신청키로

“멀리 고향을 떠난 지 40여년 만에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하고 봄이 왔네!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데없고,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국마다 수심에 차네. 마음은 죽었는데 한은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는가.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 이 외로운 중! 다시 구름 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수구한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초의선사 탄생 227주년'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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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초의가 태어난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일원에서 ‘초의탄생문화제’가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문화제는 무형문화재 등재를 위해 용훈 스님과 그의 제자 24명이 밤을 새워 각자 한 가지씩 정성스레 만든 24가지 절 음식을 바치는 것으로 시작, 모든 절차를 기록에 남겼다. 용훈 스님은 이 자료를 등재 신청할 예정이다.

홍석주가 “호남의 스님 초의는 학자,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시문은 속성을 벗었고 또 정결·간결해 마치 당·송시대의 그것과 같이 군더더기가 없이 맑다”라고 한 것처럼 그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의 것이었다.


속성은 장씨이며 어릴 때 이름은 알 수가 없다. 법명은 ‘의순’이며 15세 때 나주에 있는 운흥사에서 벽봉민성을 은사로 출가했다.


19살에 나주에서 해남으로 가는 도중 월출산에 올랐던 그는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홀연히 깨치니 이후로 막힘이 없었다 한다. 그 뒤 대흥사에서 완호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호를 이때 받았다.


초의는 81세로 일지암에서 입적할 때까지 다와 시·서에 능통한 것은 물론이고 특히 불화 솜씨는 근대 불화작가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과 교류했으며 소치 허련의 남종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노상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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