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김민진 차장
역사의 전환점이 된 계기가 때론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하면서 남ㆍ북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수백, 수천 만명의 원주민 학살과 노예사냥이 시작됐고 그 땅에서 수탈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금과 향신료를 찾기 위해 '동방'을 탐험하던 그의 무지와 항해 오류가 변변찮은 무기도, 다른 세상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던 원주민들에게는 수 백년을 유린당하는 재앙이 된 것이다. 콜럼버스의 등장이 유럽인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신대륙 발견의 역사겠지만 '인디언'으로 이름 붙여진 원주민들에게는 수천, 수만 년을 지켜온 종족의 존엄과 생명을 뿌리째 흔드는 고통과 치욕의 역사가 됐다.
위대한 발견에는 종종 행운이 따르기도 한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수백 년 전 30세 안팎에 불과하던 인간의 평균수명을 수십 년 더 늘려놨다. 3명 중 1명꼴로 나타나던 영유아 사망률도 현격하게 낮아졌다.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이 기적의 약물인 항생제를 발견한 것은 우연찮게 자라난 푸른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천연두, 홍역, 말라리아, 콜레라, 패혈증 같은 질병 치료에 효과를 봤다.
법과 제도도 마찬가지다. 의도치 않은 사건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기도 하고 그것이 역사의 필연이 되기도 한다. 1987년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고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선거의 직선제 개헌을 발표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조선시대 공물제도의 폐단을 막기 위해 시행된 대동법은 처음 건의된 이후 부분시행과 폐지를 거듭하다 100년이 훨씬 지나서야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각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조정에 바치는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당시 조세제도의 가장 심각한 폐단 중 하나로 인식됐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와 신분사회의 기득권에 부딪혀 시행되기까지 100년이 넘게 걸렸다.
고용노동부는 13일 회사와 직원의 고용관계를 규정하는 표준근로계약서에서 '갑(甲)'과 '을(乙)' 단어를 삭제하는 대신 이를 '사업주'와 '근로자'로 바꿔 보급하기로 했다. 정부의 결정에 며칠 앞서 현대백화점은 전 협력사와의 거래 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라면상무'로 회자된 포스코에너지 임원 사건과 남양유업 직원의 대리점주 폭언 사태 등으로 '갑'이란 단어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된 데 따른 것이다.
문득 90년대 후반 기자의 첫 직장생활이 생각난다. 당시 알게 된 A사 판매부서 직원들의 권한과 횡포(?)는 만만치 않았다. 당시에도, 지금도 글로벌 철강회사로 이름이 잘 알려진 회사다. 요즘 뉴스를 보면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관행이나 행태, 즉 '갑질'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동반성장이니 상생이니 하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린다. 하지만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일련의 사건이 헤프닝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김민진 기자 asiak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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