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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강윤후 '한밭, 그 너른 들에서' 중에서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7초

(.....)/먼 도시의 지인들 사이에 떠도는/나에 대한 소문들을 듣기도 한다/소문에서 나는 무엇에 대단히 화가 나 있거나/누구를 아주 미워한다 행복한 가장이 되어/세월을 잊고 세상일마저 모른 채 지낸다고도 한다/소문만으로도 내 근황이 충분하므로/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듯 일없이 달력이나 넘겨본다/아무 징조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그러다/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는데 문득/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이 너른 벌판 어디쯤에선가 나도/그렇게 시동이 꺼질 것이다/갑작스레 멎을 것이다


강윤후 '한밭, 그 너른 들에서' 중에서


■ 거울이나 물의 수면으로 가끔 볼 수야 있지만, 제 눈으로 제 육신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불완전하다. 아무 장치도 없이는 아무리 용을 써도 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기껏해야 팔뚝이나 다리, 그리고 눈을 깔아 자신의 복부 비만 정도를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자아 성찰이 어려운 까닭이, 이 신체적인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다. 다행히,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나의 거울이 되어준다. 시골 시인 강윤후도 서울에서 떠도는 자기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그 떠도는 '나'는 얼마나 우습고 헛된 것들인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들이 잘못 알았다고 손사래를 치는 일 또한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 그쯤에서 나의 삼엄한 진실을 만난다. 어느 날 문득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를 맞은 듯 띵 해진다. 내가 누군지 이렇게 헷갈리는 사이, 갑자기 시동 꺼지듯 삶이 멎을 것이다. 이 고독한 생의 인식을 대면하는 일만으로도, 이 시는 값지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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