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그림살롱 101회 | 서양화가 김명식 ‘그대를 위한 선율’시리즈
그러므로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을 희망이라 한다. 정숙한 햇살이 창문을 열자 뭉툭한 가슴으로 와락 안겼다. 오오, 이 철부지가 부질없는 사랑의 씨방이었다니!
잎사귀엔 초록 윤기가 빛났다. 나지막한 언덕에 홀로 서있는 키 큰 미루나무 위를 뭉실뭉실한 양떼구름이 느린 산보처럼 지나갔다. 소녀는 나무가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며 잎사이 구름꽃을 연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름다움을 최초로 보았다는 황홀, 하루에도 천만번 밀려드는 외로움과 쓸쓸함. 산다는 것은, 마음의 색채위에 물결처럼 교차하는 저 나무 끝에 떨리는 여린 이파리의 서성거림….
팔락팔락 잎들이 경쾌하게 너울거린다. 활력으로 충만한 선율이 가볍게 유머를 던지듯 매끄럽게 정오의 바람을 가른다. 바흐(J.S Bach)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두 마음을 이끌어간다. 서로 번갈아 찬미하며 융화하는 화음은 싱싱한 교감의 정신을 들려줬다.
‘우리의 리듬은 어디쯤일까?’ 신록의 청춘처럼 투명하고 맑은 행진이 리드미컬한 율동으로 고음을 넘을 때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머뭇거렸었지만, 악보위로 한 일생이 흐름을 보았다. ‘지루하지 않기를.’ 그는 독백처럼 짧게 자그마하게 답했다.
유장한 선율이 저녁을 불러 세웠다. ‘노을, 그 이상의 원숙미는 없다’고 희끗한 머리의 중년이 젊음에게 천천히 말했다. ‘바흐의 곡엔 아픔이 있어 더욱 좋아’라며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저녁 물안개가 아코디언 연주처럼 이리저리 쏠릴 때 발갛게 물든 황혼이 호수의 선착장에 휴식의 문패를 내걸었다.
그때 재회의 세레나데가 잔물결에 녹아들었다.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진솔한 대화가 신들이 사랑하는 의식과 어둠, 또한 시의 고상함에 호소하기를”<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詩, ‘송가1960’>
진한 꽃향기가 정적을 흔든다. 그런 당신이 지나간 후, 팔짱을 낀 채 바람에 나부끼는 광대한 우주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시큼떨떠름한 농익은 얼굴빛으로 눈썹을 길게 내려 깔았다. 그 막연한 침묵에 돌연 ‘향기는 왜 걷지 못하는 걸까’라고 그녀가 감미(甘味)로운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길을, 잘 알아서일까?’라고 답하려다 ‘아마 재촉했기 때문 일거야’라고 말했다. 소낙비가 지나간다. 비는 내리는데 땅은 메마르다. 고백하자면 여태껏 나는 알지 못한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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