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세계 10대 음모론’을 발표했다. 19세기부터 제기되었던 셰익스피어의 정체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9.11 테러의 배후가 미국 정부라는 주장까지 음모론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밖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현상 이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실체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 영화 <모비딕> 또한 거기서 출발한다. 1994년, 멀쩡했던 다리가 폭파되고 정부는 곧 남파 간첩의 소행이라고 발표한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그것이 거짓임을 감지한 사회부 기자 이방우(황정민)는 사건과 관련된 비밀문서를 우연히 손에 넣게 되고 “정부 위의 정부”라는 ‘모비딕’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10_LINE#>
의외로 심심한 음모론을 대신할 다른 재미가 있다
신문에 난 모든 기사가, 정부에서 말하는 것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정보는 가공하는 집단의 구미에 맞게 교묘하게 재편되거나 주장하는 바를 가리키기 위해 재배치된다. 그 공정에서 팩트는 왜곡하거나 조작하기 손쉬운 원재료다. <모비딕>의 모티브가 된 윤석양 이병의 양심 선언으로 밝혀진 것처럼 모비딕이라는 모종의 세력은 민간인 사찰을 통해 얻은 팩트로 제거되어야 할 희생양을 물색하고, 불안을 조장할 한 판의 쇼를 설계한다. 노동운동을 하던 평범한 서점 주인은 간첩단의 일원으로 둔갑하고, “약한 거 한방, 강한 거 한방 빵빵 터뜨”리는 연극의 배우로 전락한다. 특종만을 쫒던 방우에게도 그들의 사찰 자료와 수많은 의문사 파일은 각성의 단초가 되고, 아무리 더듬어도 그 덩치조차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백경에 원고지와 펜을 들고 맞서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방우와 그의 동료들이 맞닥뜨리는 위기와 사건들은 익숙하게 보아온 뉴스와 오버랩 된다. 북한의 소행으로 종결되던 굵직굵직한 사건들, 행위는 있는데 주동자는 없는 민간인 사찰 같은 관행까지 지금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병폐들은 음모론이라기에도 무색할 정도로 실제 상황이다.
<모비딕>은 음모론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음모를 밝혀가는 과정이 치밀하거나 긴장감이 넘치지는 못한다. 이야기를 작동시킨 “정부 위의 정부”라는 실체에 대해서도 어물쩍 넘어간다.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기사를 쓰기위해 분투하는 기자들의 세계가 가지는 에너지가 영화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자신의 일이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데 일조한다고 믿고, 관찰자의 무력감을 직업의 의무를 다함으로서 극복하는 이들은 실종된 기자정신을 찾아 나선 원정대 같다. 여기에 9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소소한 설정들은 또 다른 재미다.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쓴 기사, 플로피 디스크라는 최첨단 문물을 두고 어쩔 줄 모르는 주인공, 휴대폰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 긴장을 주는 삐삐까지 <모비딕>은 예상하거나 기대했던 재미 의외의 것을 더 효과적으로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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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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