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률 낮지만 안전자산 인식… 수백억대 중형건물까지 ‘기웃’
서울 강남에 사는 50대 남성 김씨는 지난 달 말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S건설의 사옥을 400억 원에 사들였다. 은행에서 100억 원을 대출받고 나머지는 MMF(머니마켓펀드)와 주식 등 금융자산을 처분해 충당했다.
김씨는 주로 금융상품에 자산을 투자해왔다. 그동안 소위 강남 부자들의 제1 투자처라는 재건축 아파트 등의 부동산 상품에 투자한 이력이 없다. 김씨는 “서울 강남지역 빌딩은 아파트 등 일반 부동산 상품보다 하방경직성이 강한 상품”이라며 “수익률이 높지 않더라도 은행 예금 상품만큼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9년 토지보상금을 받은 박씨는 100억 원대의 서울 강남권 중형 빌딩 매입을 검토 중이다. 애초 50억~70억 원대의 소형 빌딩을 사려고 상담을 받고 있다. 그러나 투자하기에 마땅한 물건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박씨는 “지난해부터 서울 핵심지역의 빌딩을 사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매도 호가가 올랐다”며 “투자금액을 두 배 가까이 확대해 물건을 사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마땅한 물건이 없어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소형 빌딩 시장을 주로 매입하던 개인 자산가들이 수백억대의 중형 빌딩시장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 등 핵심지역의 중형 빌딩 구입은 목돈이 든다. 하지만 가격 하락 위험이 낮은 안전자산이란 인식이 강해지면서 투자 금액 확대에 나선 것이다. 최근 주식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개인 자산가의 빌딩 투자금액을 키운 요인이다.
부동산 및 은행 프라이빗뱅킹(PB)업계에 따르면 최근 개인 자산가들 중 100억 원 이상의 빌딩을 사겠다는 수요가 눈에 띄게 늘었다. 논현동 프라임상호저축은행빌딩과 삼성동 남흥빌딩 등이 개인 자산가가 수백 억원의 거금을 투자해 사들인 대표적인 사례다. 그동안 개인 자산가들이 30억~70억 원대 빌딩을 가장 많이 찾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장진택 ERA코리아 전략기획팀 이사는 “공급 부족으로 중소형 빌딩의 매도호가가 오르면서 거래 금액 단위도 커지고 있다”며 “안전자산이란 관점에서 수백억 원대 빌딩의 매입을 고민하는 부자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 자산가들이 이처럼 빌딩 투자 규모를 확대하고 나선 것은 시중의 유동자금을 흡수할 만한 투자 대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찾아온 부동산 침체로 대표 투자상품인 아파트 시세가 큰 폭으로 떨어졌다.
대박을 터뜨린다는 강남 재건축 아파트마저 조합원 간 갈등, 분담금 폭탄 등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태다. 주식시장 역시 급등락이 심하다. 이에 반해 서울 강남권 중소형 빌딩 가격은 금융 위기 후 큰 폭의 등락 없이 보합세를 유지,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입지를 굳혔다.
패션, 뷰티, 고품격 인테리어 업체, 고급 레스토랑 등의 실수요가 서울 강남 등 핵심지역 중소형 빌딩 임대시장을 떠받치고 있다는 점도 투자 규모를 키운 요인이다. 초대형 빌딩이나 외곽지역 빌딩보다 공실률 위험이 낮다 보니 투자금액 확대에 대한 부담감이 덜하다는 얘기다.
이남수 신한은행 부동산 팀장은 “강남권 빌딩의 임대수익률이 3~4%대에 그치지만 투자자들은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중장기적으로 투자가치도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빌딩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가가 큰 폭의 변동성을 보이고 있어 강남의 자산가들은 자금을 이동시키기를 꺼려하는 분위기다. 우리도 마땅한 재테크 투자처를 추천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단기나 사모 형식의 틈새상품에 대한 주문이 많은 편이다.”
증시보다 단기상품-사모펀드 관심
거액 자산가들을 상대하는 강남지역의 프라이빗 뱅커(PB)들은 최근의 주가 조정에 따른 고액 자산가들의 투자 트렌드에 대해 공통적으로 이같이 말했다. 시장 변동성이 큰 데다 어디 하나 뚜렷하게 부상하는 투자처가 없다보니 보장이 확실한 단기 상품과 투자자가 49인 이하로 제한되는 사모 형식의 투자에만 자금이 몰린다는 것이다. 은행 예금보다는 주가와 연동되는 파생상품, 만기가 짧은 채권 등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높다는 것.
박기섭 신한은행 강남PB센터 팀장은 “금값이 많이 올랐지만 금 투자에 대한 자산가들의 주문이 많다”며 “이에 따라 원금을 보장해주는 파생결합증권(DLS)을 사모로 모집 중”이라고 말했다. 박 팀장은 “다음 주까지 50억 원에서 100억 원을 한도로 모집할 예정”이라며 “수요가 워낙 많아 한도 달성은 무난할 것을 본다”고 덧붙였다.
이흥두 국민은행 강남PB센터 팀장은 “최근에는 기업어음(CP)을 추천한다”며 “30억 원에서 50억 원 한도로 최근 판매한 상품이 2개월 만기 연 6%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또 단기상품 중에는 신용등급 BBB 이상의 단기 회사채에 대한 수요가 많다고 전했다. 연 6% 수준은 예금 금리의 2배에 가까운 금리다.
김중석 미래에셋증권 잠실지점장은 “채권을 많이 보유한 고액자산가는 만기가 짧은 채권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헤지펀드에 대한 추천도 많은 편이다.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투자를 꺼려하는 투자자들도 있지만 다른 자산과 연관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소개한다는 것이다.
오소영 동양종합금융증권 금융센터강남역지점장은 “부담은 있지만 절대수익을 추구한다는 것과 다른 자산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PB센터를 중심으로 헤지펀드 추천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오 지점장은 “현재까지 헤지펀드에 투자된 자금은 전 금융기관에서 1400억 원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불확실한 주식시장과는 달리 절대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이 투자매력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거액 자산가들은 특히 부동산에 대한 시각이 변했다고 PB들은 말한다. 김중석 지점장은 “거액 자산가의 경우 부동산 자산이 많은데 경기 상승에 대한 기대감은 부동산 시장에 긍정적인 시그널”이라고 말했다.
오 지점장도 “큰 건물 매입은 꺼리지만 작년부터 부동산 증축 및 개축 등 중소형 상가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펀드에 대한 전망도 작년에 비해 좋아졌다고 한다. 이 팀장은 “주가가 조정을 받고 있지만 펀더멘털이 나쁘지 않고 기업 영업 이익률을 좋게 보기 때문에 국내 주식형펀드도 향후 투자처로 추천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PB들은 최근 금융통화위원회의 기준금리 인상과 관련해서는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고 자산 포트폴리오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예상이 됐던 데다 시장금리에도 선반영됐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따라서 정기예금 등에 단기간에 큰 자금이 몰리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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