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박은희 기자] 77세 노(老) 학자 이근후(사진) 박사는 졸업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배움을 일단락 짓는 게 싫어서다. 이 박사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이골이 났을 법한 공부에 아직도 아쉬움을 느끼는 그는 지난 19일 열린 고려사이버대학교(총장 김중순) 학위수여식에서 문화콘텐츠 학사 학위를 받아 길고 긴 '가방끈'을 기어이 늘인 최고령 졸업생이다.
이박사를 끝없는 배움의 길로 이끈 건 봉사와 희생에 대한 신념, 여기에서 우러난 무한한 지적 욕구다. 쉼 없이 탐구하고 배우는 일은 그를 '실버'가 아닌 '청춘'으로 묶어뒀다. 배움에 중독된 이 박사를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영동 (사)가족아카데미아에서 만났다. 이 박사는 의료ㆍ교육 봉사 단체 가족아카데미아의 이사장이기도 하다.
배울 만큼 배운 그가 다소 엉뚱하게도 사이버대학에, 그것도 전공과 무관해 보이는 문화콘텐츠학에 기울인 관심은 30년 가까이 진행해온 의료봉사와 관련이 깊다. 등산을 좋아하는 이 박사는 의학도가 되기 전부터 꿈꾸던 히말라야 등반 기회를 산악회 학술요원 자격으로 1982년 우연히 얻었다. 학술조사차 6개월 동안 마을을 둘러보고 히말라야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이 박사는 당시 네팔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 충격을 받았고 즉각 현지 봉사활동을 다짐했다. 이후 이 곳을 '내 집'처럼 오가며 고된 봉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박사의 '봉사 철학'은 '나눔'으로 요약된다. 이 박사는 "봉사란 대등한 위치에서 나눔에 대한 역할을 분담하는 것일 뿐, 일방적으로 베푼다는 건 문화적 우월감에서 오는 오해"라고 말한다. 문화엔 경ㆍ중이 없고 '어느 문화가 어느 문화보다 더 낫다'고 말 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이런 그에게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일은 숙명이었다. 이 박사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속한 지역의 문화, 이에 따른 시대나 환경, 가족,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봉사를 하면서 네팔 문화를 체계적으로 깊고 심오하게 알고픈 욕심이 생겼는데, 결과적으로는 전공선택과도 맞닿아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봉사는 문화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역할을 나누는 것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따듯한 마음이 자칫 무거울 수 있던 수 십 년 발걸음을 경쾌하게 이끌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학업에 대한 커다란 욕구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게 만들어주는 힘이 됐다.
이 박사가 문화를 공부한 건 네팔과의 '교감'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군의관이던 1968년, 이 박사는 광명보육원 아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돌보던 아이들 상당수는 고아가 아니라 부모한테 버림받은 위기가정 아이들이었다. 이들의 아픈 경험은 치유가 어려운 깊은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이 박사는 "정서에 자리잡은 병, 감정에 난 상처는 이성적인 접근보다 예술에 의한 정서적 접근을 통해 마음을 이해해야 고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런 기억을 토대로 그간 친분을 쌓아온 문인들과 함께 1995년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했고 2005년에 사단법인으로 전환시켰다. 이 단체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보육원 봉사다. 이 박사가 심혈을 기울이는 분야이기도 하다.
원격 시스템으로 언제 어디서든 강의가 가능한 사이버대학 특유의 교육 과정이 무척이나 참신하게 느껴졌고 학생들 가르칠 때 활용해보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나기도 했다는 이 박사에게 고정된 배움의 영역은 없는 듯했다.
사람을 이해하려 끊임 없이 배울 거리를 찾는 이 박사의 '노년'은 더 배울 게 없어져야만 시작될 것 같다. 막내 아들이 전공한 독립영화를 배워보고 싶다는 그가 언젠가 연극영화학으로 다시 한 번 학사모를 쓸 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머릿속을 스친 이유다.
정준영ㆍ박은희 인턴기자 foxf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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