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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 염기훈을 향한 팬들의 비난, 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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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 염기훈을 향한 팬들의 비난, 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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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황선홍 포항 감독. 지금은 현역시절 90년대 최고의 공격수로 기억되지만, 실제로 1990년대는 황 감독에게 잔혹한 시절이었다.

계기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이었다. 승리하면 최초의 월드컵 16강 진출이 유력해지는 경기였다. 하지만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당시 주전 공격수였던 황 감독은 많은 득점 기회를 놓쳤고,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비난여론에 휩싸였다. 축구 팬들은 그를 향해 '홈런왕' '매국노'라 부르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실추된 이미지는 회복되기 힘들었다. 1994년 월드컵 이후 황 감독은 1995년 K-리그 8게임 연속골,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18경기(예선포함) 13골 5도움을 기록했다. 1999년 J리그 득점왕도 차지했다. 하지만 A매치 TV 중계 화면에 황 감독이 나오면 응원보다 비난이 앞섰다. 그가 뜬 공을 찰 때면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라고 혀를 찼다.

황 감독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직전에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4년 전 월드컵의 부진을 떨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에게 돌아온 건 격려가 아닌 비난이었다. 심지어 "또 욕먹을까 봐 다치지도 않았는데 도망친 거냐"는 말까지 나왔다.


'부진' 염기훈을 향한 팬들의 비난, 그에 대한 단상


황 감독은 당시 인터넷에서 악성댓글을 본 뒤 "비겁하게 도망갔다는 글을 보고 세상 참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털어놨었다. 대인기피증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런 황 감독에게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이었다. 그는 당시 선제결승골을 뽑아내며 한국에 월드컵 첫 승을 선물했다. 득점 후 손가락을 흔드는 그의 모습에는 카리스마가 넘쳤고, 그렇게 황 감독은 '역적'에서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해 10월 ‘스트라이커의 표본’이란 평가와 함께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또 다른 선수 하나가 과거 황 감독 못지않은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바로 염기훈이다.


'부진' 염기훈을 향한 팬들의 비난, 그에 대한 단상


염기훈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은 늘 조심스럽다. 염기훈에 대한 비난 일변도의 여론 때문이다. '마녀사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염기훈이 지난 남아공월드컵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분명 기대 이하였다. 특히 아르헨티나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절호의 득점 찬스를 놓친 장면은 너무도 잔혹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해 6월 이후 염기훈과의 세 차례 만남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얘기는 바로 '월드컵'이었다. 염기훈은 그때마다 매번 같은 표정을 지었고, 같은 생각을 내놓았다. 조금은 겸연쩍게, 조금은 쑥스럽게.


"월드컵 끝나고 개인적으로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얻은 것도 많다고 생각해요. 월드컵 때와 같은 실수를 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팬들의 비난을 받아들이고 인정합니다. 죄송할 따름이죠. 다만 앞으로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어떻게 들으실진 모르겠지만, 월드컵의 부진은 다 털었습니다. 소속팀에서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좋은 모습 보이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부진' 염기훈을 향한 팬들의 비난, 그에 대한 단상


염기훈은 애써 평온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씁쓸한 웃음에서 그간의 마음고생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시 K-리그에서 6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올리는 등 펄펄 날던 그였지만 월드컵 부진 이후 대표팀 유니폼만 입으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몸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너무 잘 하려다 보니 제 기량이 발휘되지 않는다는 인상이었다.


염기훈는 현 대표팀에서 이영표, 박지성, 차두리에 이어 A매치 출장 횟수가 4번째로 많은 선수다. 월드컵의 실수로 그 모든 경력에 낙인을 찍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월드컵 이후 대표팀에서 염기훈에게 주어진 기회는 3경기 51분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전부 교체출장이었다. 낙인을 지우고 대표팀에 어울리는 선수라는 것을 다시 증명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해보자. K-리그 어느 팀의 팬이건 염기훈이 공을 잡으면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반대로 수원의 팬이라면 염기훈이 공을 잡을 때 기대하게 됐다. 지난 시즌 수원의 후반기 대반전을 이끈 것은 염기훈의 맹활약이었고, FA컵 우승의 주역도 MVP를 수상한 염기훈이었다. 박주영(AS모나코)이 빠진 현 대표팀에서 기성용(셀틱)과 함께 가장 뛰어난 프리키커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는 좋은 선수임이 틀림없다. 허정무 전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조광래 감독도 그를 믿는다.


지난해 10월 한일전 당시 교체출장했던 염기훈을 다시 유병수로 교체한 것을 두고 조 감독이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조 감독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경기 후에도 “염기훈의 교체는 질책성이 아닌 유병수 투입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나 역시 염기훈을 도중에 뺀 것은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한일전 직후 FA컵 결승전 후엔 직접 염기훈에게 전화를 걸어 “멋진 골이었다”고 다독였다.


물론 대표팀에서의 최근 염기훈의 활약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에 대한 건강한 비판과 실망감은 정당하다. 하지만 ‘마녀사냥’식의 아픈 비난은 이제 접어두는 게 어떨까. 그 역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태극전사’고, 황 감독처럼 다시 일어서서 우리를 기쁘게 할 능력이 충분한 선수다. 염기훈의 왼발에 다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건 애정 어린 비판이지 증오 섞인 비난이 아니다.




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 spre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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