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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남긴 ‘동양평화론’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안중근이 김기룡, 강기순, 박봉석 등 단지혈맹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자른 것은 1909년 3월 5일.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에서는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자’며 일제히 손가락을 끊었다.

그 결심은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사건으로 이어진다. 10월초 소문과 신문을 통해 이토오 히로부미가 22일께 중국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거사를 결심한다. 안중근은 우덕근과 동행의거를 제의하고, 우덕순도 동의한다. 이에 2000만 조선인의 가슴속에 남겨질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은 1909년 10월 26일 일어난다.


이로 인해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제6최 최종판결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우덕순에게는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일제는 선고한다.

이러한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은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며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한다.


안 의사는 옥중인 1910년 3월 15일에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탈고했다.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92일만에 탈고를 마친 것이다. 안 의사는 이어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또 국가안위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등 한문 붓글씨로 된 많은 유작을 남기기 시작했다.


동양평화론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계획했지만, 서문과 각론만 집필했으며 나머지는 완성하지 못했다. 안의사가 갇혀있는 감옥소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비단과 지필묵을 가지고 와 기념 소장할 붓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안 의사가 집필한 안응칠역사나 동양평화론 등은 하나같이 동양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신념은 법정진술이나 사형직전 유언에서도 드러나 있다.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는 형집행 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나의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라면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말하고 순국했다.


이런 정신은 그를 따르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게 되며 그의 일가친척도 뒤를 따른다. 안 의사의 동생 정근씨, 사촌 명근씨 등 친인척 10명은 국가보훈처가 펴낸 대한민국 독립유공 인물록에 이름이 올랐다. 모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들이다.


26일은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이자 순국 99주년이다. 안 의사와 그의 친인척 등과 같은 애국애족 인사들이 있었기에 대한독립이 가능했고 오늘날의 자랑스런 한국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김주현 독립기념관장은 “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안 의사의 의거는 피압박 약소민족이 세계로부터 찬양을 받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면서 “1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대한독립과 세계평화를 염원했던 평화주의자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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