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김평화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각국을 상대로 관세 청구서를 내미는 가운데 국가별로 다른 셈법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은 유사한 청구서를 받아들였지만 세부 이행 방안을 두고 각각 미국과 씨름을 지속하는 모습이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경제 밀착도를 고려하면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가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중국 역시 고관세로 실질적인 강 대 강 대치가 있기보단 협상 결과 별 성과가 없어서 서로 '승리'라며 정치적 선언을 하며 봉합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란 게 전문가 전망이다.
미국은 최근 EU와 일본을 상대로 일차적인 관세 협상을 마친 뒤 추가적인 세부 합의를 마무리했다. 우리나라는 추가 세부 협상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미국은 주요 동맹국과 15% 관세 협상을 끌어낸 뒤 각종 투자 약속과 함께 비관세 장벽을 완화한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문서화하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다만 세부 협상 과정에서 국가별 셈법은 다른 모습이다. 협상 방식은 유사해 보여도 국가별 특수성에 따라 내어주고 받는 것에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EU는 그간 미국을 상대로 관세뿐 아니라 비관세 장벽 등을 두고 있었기에 이를 낮추면서 관세 외에 추가 요구가 비교적 덜한 상황이다. 반면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는 관세뿐 아니라 과도한 대미 투자 이행 압박을 받고 있다.
EU의 경우 6000억달러의 투자 주체가 EU나 회원국 정부가 아닌 '유럽 기업(European companies)'이라고 돼 있는 반면 일본은 5500억달러의 투자 재원을 조달할 주체가 '일본(Japan)'이라고 돼 있다. 일본은 투자 펀드 운용과 투자 사업 선정 권한을 미국이 갖게 돼 있는 것과 달리 유럽은 '유럽 기업이 2028년까지 6000억달러를 전략 산업에 투자할 것으로 기대된다'는 표현으로 돼 있어 실제 투자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EU가 책임지지 않는다. 게다가 일본은 원금을 회수할 때까지는 발생 수익을 50대 50으로 배분하고, 원금 회수 이후에는 90%를 미국이 갖는다. 미국은 3500억달러 투자를 예고한 우리나라에도 일본 방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었기에 관세가 없어 이쪽에서 협상할 게 없다"며 "비관세 쪽도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추가 개방과 사과 등 과일 수입은 정치적 이슈 때문에 하기 어렵다고 하니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투자 쪽으로 (요구를) 급선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정 한국국제통상학회장(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은 "협상안 자체는 유사해 보여도 한국 경제 위상을 일본, EU와 비교했을 때는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며 "이런 면에서 협상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협상 내용을 보면 한국이 불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후에도) 미국은 일본과 협상한 내용을 토대로 우리에게도 (협상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EU와 일본, 우리나라 등이 전면전을 하거나 강하게 거부하기가 어려운 만큼 협상 테이블을 떠나 다양한 다자 협력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멕시코와 캐나다의 경우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이 있는 데다 현지에 진출한 미국 기업이 많아 미국이 다른 나라 사례처럼 관세 협상에 쉽사리 마침표를 찍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멕시코와 캐나다는 미국의 1, 2위 무역국"이라며 "(미 관세 요구에) 반발하느냐, 적응하느냐 사이에서 태도를 안 정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한미 FTA를 밀어낼 수 있어도 USMCA는 그럴 수 없고 처리가 복잡하다"며 "캐나다와 멕시코를 때리면 현지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향후 EU뿐 아니라 캐나다와 멕시코 대응 귀추를 보는 게 세계에서 트럼피즘(Trumpism·트럼프주의) 확산 강도를 읽는 데 있어 중요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역시 관세 전쟁이 본격화할 경우 미·중 모두에 큰 피해가 될 수 있어 미국이 중국에 고관세를 부과하기보단 지금처럼 정치적 선언을 이어가는 데 집중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 연구위원은 "근본적인 문제는 양국이 정말 정면으로 붙어서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현재까지 세 번의 (미·중) 협상이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는데도 '협상이 잘됐다'는 식으로 결론 지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