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별명은 고집불통'…입학 동시 시작된 낙인찍기[경계선 속 외딴섬]

①'작은 사회' 학교 진입부터 난관
정보 부족 탓에 진단 시기 지연
함구증·공격성 탓에 문제아 인식
또래 무리 배척돼 사회성 결여

편집자주'느린 학습자'라는 외딴 섬에 사는 이들이 있다. 전문가 추산에 따르면 지능지수 정규분포상 국민 10명 중 1명(13.6%)은 이 외딴 섬에 산다. 이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다. 영·유아기 첫 진단을 시작으로 진로를 찾고 자립을 하는 모든 과정이 각자도생이다. 부모는 이들이 사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월 수백만 원의 치료비를 감당하고 친구 관계와 직업까지 손수 찾아 나선다. 최근 들어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 조례를 내놓고 있지만, 허울에 그치거나 청소년기 지원에 한정된다는 문제가 있다. 아시아경제는 유아기·청년기 느린 학습자 자녀를 둔 6명의 학부모를 만나 이들이 마주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해법을 모색한다.

#남들보다 조금 느린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매번 20점을 넘지 못하는 받아쓰기 점수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 믿었다. 애써 다잡았던 박준희씨(47·가명)의 마음은 담임 선생님 문자 한 통에 무너져 내렸다. 막내딸 김서아양(9·가명)이 짝꿍과 매일 다투고 교사 지도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양은 선생님이 전후 사정을 물어올 때마다 굳게 입을 닫고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떴다. 결국 박씨는 열 명의 학부모에게 전화를 돌린 끝에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짝꿍은 몇 달간 김양의 가방에서 연필을 훔치고 '바보'라고 부르며 괴롭혀왔다. 박씨는 선생님을 찾아가 해명에 나섰지만 반 친구들은 한 학기 동안 김양을 '나쁜 아이'라고 부르며 멀리하기 바빴다.

김수영군이 초등학교 6학년 당시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를 노트에 옮겨 적은 모습.[사진=박준희씨 제공]

'느린 학습자'는 지적장애와 비장애인을 구분 짓는 지능지수(IQ) 71~84 사이에 속한 집단이다. 이들은 또래와 비교해 인지능력과 '눈치'로 불리는 사회성 발달이 한 단계 느린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성 탓에 느린 학습자는 초등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편견과 배척의 대상이 된다. 특히 허술한 정부의 지원책과 교사들의 인식 부족은 느린 학습자들이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정보 없는 탓에 인지 늦어…비싼 진단비도 자비 부담

부모는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진단'이라는 첫 번째 난관에 직면한다. 자녀가 또래와 비교해 이해가 다소 느린 아이인지, 느린 학습자에 속하는지 구분할 잣대가 마땅치 않아서다. 초등학교 고학년 들어서 덧셈과 나누기 등 사고력이 필요한 초등교육을 받게 될 때 비로소 눈치를 채는 경우가 많다.

진단 지연은 발달 장애인과 달리 이들의 특성이 사회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 크다. 느린 학습자는 인지적인 측면에서는 집중력을 유지하고 추상 개념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정서적으로는 감정과 의사 표현이 서툴다 보니 공격성과 우울감을 보일 때가 많다. 사회적으로는 연령대에 맞는 어휘 사용에 어려움을 느낀다.

[이미지출처=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이런 전문 지식이 없는 학부모는 우울증 등 기타 정신질환을 이유로 병원을 찾았다가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박씨의 첫째 아들 김수영군(18·가명)도 초등학교 4학년 때 투레트증후군(틱 장애) 치료차 소아 정신과를 방문했다가 진단을 받게 됐다. 김군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글을 몰라 문제집을 빈 종이로 남겨두거나 참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등 징후를 보였지만 박씨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용 문제도 진단이 늦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통해 선별 검사지를 배포한 적은 있지만, 현재 대다수 학부모는 자비로 진단비를 부담하고 있다. 진단은 지능검사와 심리검사 등을 포함하는 종합심리검사(풀배터리)를 통해 이뤄진다. 사설 심리 센터의 경우 회당 40만원, 대학병원은 진단비가 100만원을 호가해 많은 학부모가 병원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늦은 진단은 지능의 퇴보로 이어진다. 진단 적기로 꼽는 시기는 통상 만 4~6세다. 해당 시기에 미술과 심리 치료 등을 적극적으로 병행할 경우 지능지수와 사회성을 끌어 올릴 수 있어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넘어서도 개선 효과는 크게 낮아진다. 실제로 만 6세에 진단을 받은 김양은 단 2년 만에 지능지수가 77에서 84로 향상됐다. 그러나 11세에 진단을 받은 첫째 김군은 현재도 언어와 학습에 손을 놓고 온라인 게임 중독에 빠져들었다.

◆공격성·어휘력 부족…느린 학습자 특성 몰라 문제아 치부

진단 이후에도 학교생활은 녹록지 않다. 교사가 느린 학습자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경우 이들에 대해 낙인찍기가 시작된다. 억울한 상황에서 어휘력 부족으로 함구를 택하거나, 감정 표현이 서툴러 표출되는 공격성만 보고는 이들을 문제아로 치부하는 것이다.

첫째인 김군 역시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빌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은 박씨에게 수업 시간에 재차 손을 들고 학습과 동떨어진 단어를 외치는 행동을 한다며 김군을 '고집불통'이라고 칭했다. 학부모들도 김군을 주말마다 함께 나들이를 가는 또래 모임에 끼워주지 않으려 했다. 학급에서도 김군은 외톨이였다. 모둠 학습이 있는 날이면 함께 조를 이룰 친구를 찾지 못해 교실을 빙빙 돌거나 쉬는 시간이 되면 놀 친구가 없어 교실 뒤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외톨이가 된 내 아이…친구 찾아 나선 엄마들

또래 무리의 배척은 느린 학습자의 사회성 결여로 이어진다. 아동들은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는 경험을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소통 능력을 배워간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찍힌 낙인은 이러한 기회를 앗아간다.

이에 느린 학습자 부모들은 동네를 떠돌며 직접 자녀의 친구를 찾아 나선다. 부산 연제구에 거주하는 학부모 김미영씨(42·가명)는 지난해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검색해 알게 된 느린 학습자 학부모 친목 모임에 가입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자녀 김지윤양(13·가명)이 공개 수업 당시 친구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친목 모임을 통해 서로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김양은 이 모임에서 생애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또래 무리가 생겼다. 이곳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유행어를 잘 알고 있는 척, 농담을 이해한 척하지 않아도 됐다.

김씨는 밝아진 딸의 모습을 보면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리다. 지자체 또는 정부에서 직접 나서서 모임을 만들면 더 많은 아이가 외로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김씨는 "학교 밖에서 사귄 친구일지라도 느린 학습자들은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힘든 학교생활을 버텨낸다"며 "지역 사회에서 주축이 되어 또래 활동을 지원하면 더 많은 아이가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사회부 이지은 기자 jelee0429@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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