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준기자
해병대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수사 회피 목적으로 핵심 인물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을 주호주대사로 임명해 출국시킨 게 아니냐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수사를 맡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늑장 수사’가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18일 아시아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공수처는 지난해 9월 이 전 장관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한 뒤 지난 7일 이 전 장관이 공수처에 출석해 조사를 받을 때까지 수사 외압 의혹에 연루된 이들을 소환해 조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수사기관은 의혹의 핵심 인물 조사에 앞서 관련자에 대한 수사를 먼저 진행한 뒤 중요 인물을 부르는데 공수처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전 장관을 조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실상 공수처가 해병대 수사 외압 의혹 수사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공수처는 지난해 고발장이 접수된 이후 고발인 등 일부 참고인 조사를 했지만, 본격적인 수사를 위한 압수수색은 올해 1월이 돼서야 진행했다. 압수수색 대상자인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박진희 전 군사보좌관 등에 대한 조사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수사외압 의혹 사건을 맡고 있는 수사4부(부장검사 이대환)는 현재 압수물 분석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압수물 분석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실무진에 대한 조사 없이 윗선부터 소환해 조사한 것은 이례적이다.
차장검사 출신 A 변호사는 "압수수색을 하고 압수물 분석을 마친 뒤 관계자들에 대해 조사를 하고 핵심 인물을 부르는 것이 수사의 기초"라며 "기초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면 물어볼 것도 없었을 텐데 왜 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공수처장 등 지휘부 공백이 3개월가량 이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공수처의 무능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중요 사건 수사의 경우 지휘부가 결정을 내려야 할 부분들이 있는데, 대행 체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수사 동력이 떨어진 게 아니냐는 것이다.
현재 공수처는 공수처장 직무대행의 대행의 대행이 지휘하고 있다. 판사 출신인 오동운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 변호사가 차기 공수처장 후보로 선정됐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 지명을 미루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 전 장관은 전날 KBS와의 인터뷰에서 "공수처가 조사하겠다면 내일이라도 귀국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소환 통보 없이도 자진 귀국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공수처가 준비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제가 자진 출석한다고 해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고 말했다.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선 "지난 정부에서 현역 군인 사망 사건에 대한 군 수사권이 폐지돼 국방부 장관이 어떠한 관여도 할 수 없게 돼 있다"고 해명했다.
한편 이종배 서울시의원은 이날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수사 비밀에 해당하는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 사실을 누설한 성명불상의 공수처 관계자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이 시의원은 "MBC는 지난 6일 주호주 대사로 임명된 이 전 장관이 공수처로부터 출국금지 조치를 당했다고 보도했다"라며 "MBC 뉴스데스크 진행자는 '저희가 취재를 해봤더니 공수처가 이미 석 달 전에 이 전 장관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말하며, 성명불상의 공수처 관계자가 출국금지 사실을 알려줬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고 고발 배경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