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민기자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전문대학교 링컨 테크에 여러 명의 기업 구인 담당자들이 방문했다. 그중에는 급격히 사세를 불려 나가던 반도체 업체 인텔의 직원인 론 스미스가 있었다.
정보기술 산업이 급성장하던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서부가 아닌 북동부 낙농업이 발달한 지역에까지 반도체 업체의 구인 담당자가 방문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 및 전자산업이 확산하고 있었지만, 관련 인력이 부족했다. 스미스는 우유 생산지로 유명한 자신의 고향에 있는 전문대인 링컨 테크를 방문하겠다고 자원했다. 링컨 테크 인근에는 허쉬 초콜릿 공장이 있다. 펜실베이니아는 크림치즈로도 유명하다. 우유가 많이 생산되다 보니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 전형적인 낙농 타운이다.
이곳에서 인텔 역사에 길이 남을 채용이 일어났다. 스미스도 자신이 인텔의 미래는 물론 약 40년 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미국의 반도체 생산 부활이라는 특명을 받게 될 어린 학생을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텔 최고경영자 팻 겔싱어(Pat Gelsinger)의 이야기다. 겔싱어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반도체 전문가다. 80년대에서 90년대 사이 인텔 중앙처리장치(CPU) 시대의 황금기를 연 286, 386, 486 CPU가 그의 참여 속에 탄생했다. 486은 겔싱어가 개발 책임을 맡았다.
지금 그의 어깨에는 애플 아이폰에 들어갈 칩이 미국에서, 미국 기업에 의해 생산돼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다. 반도체 개발에 30년을 매진했던 그는 이제 미국 반도체 생산 부활의 전도사 겸 투사로 실리콘밸리에 돌아왔고 새로운 실리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겔싱어의 인생 여정을 들여다보면 미국 반도체 산업, 특히 인텔과 애플의 흥망성쇠가 겹친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겔싱어 CEO는 자신을 '농장소년(farm boy)'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그는 흙수저 출신이다. 첨단 IT 기술과는 담을 쌓은 곳에서 태어났고 농부로 자랐다.
겔싱어는 펜실베이니아주 동부의 버크스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2010년 인구 조사 당시 주민이 2000여명에 불과한 작은 동네다.
이 지역은 '아미시(Amish)' 주민들이 거주한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겔싱어 역시 아미시라고 서술하고 있다. 아미시는 '미국의 청학동'이라 할 수 있다. 농경지를 일구고 소를 키우는 독일, 네덜란드계 가족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 마을이다. 세상의 문명과 결별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아미시 주민들은 종교적 이유를 들어 백신 접종도 거부하곤 한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도 그랬다. 지금도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탄다. TV를 잘 보지 않는 마을이다. 세탁기도 없다. 2021년 아미시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예스러운 생활 모습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곳에서 인텔의 최고 경영자가 탄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차로 1~2시간 거리에 있는 뉴저지주 소재 벨연구소(Bell Lab)에서 세계 최초의 반도체 트랜지스터가 탄생했다. 하지만 시골 출신인 겔싱어에게는 지구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겔싱어의 직업은 출생과 함께 정해졌다. 농부다. 8명의 형제자매가 있던 아버지는 네명의 자식을 낳았다. 겔싱어는 맏아들이었다. 가족 소유 농장이 없었지만, 집안 농사일을 이어받을 처지였다.
학교, 농장, 교회를 오가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젖소, 돼지를 키우고 콩과 수수를 재배했다. 방학에 들어가는 날은 사냥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반도체와 컴퓨터의 힘으로 미국이 달을 정복하는 시절이었지만 겔싱어 가족은 그렇게 옛 방식대로 살았다.
겔싱어는 지난해 1월 200억달러 규모의 오하이오주 반도체 공장 신설 계획을 발표하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했다.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이 겔싱어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드라마틱한 인생 반전을 이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어제 부인(질 바이든 여사)이 내일은 어떤 일이 있냐고 묻길래 반도체 공장 투자 건과 전문대에서 경력을 시작한 당신의 이야기를 해줬다. 그랬더니 질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겔싱어와 같은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이다. 바이든도 동향 사람인 겔싱어의 이력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랬기에 전문대 강사인 영부인에게 겔싱어의 인생 스토리를 설명했을 것이다.
질 바이든 여사는 지금도 전문대(community college)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문대 강사의 역할에 큰 자부심을 갖는 질 여사가 전문대 출신으로 경력을 쌓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경영자에게 감탄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농부로 평생을 살기에는 겔싱어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기회가 생겼다. 학교 인근에 있는 링컨 테크라는 전문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는 시험에 덜컥 합격한 것이다. 16살 때인 1977년이다. 우리 나이로 고1이다. 그는 스스로 신데렐라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겔싱어는 1년 후 뒤늦게 링컨 테크에 입학했다. 혹시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면 수업료를 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는 링컨 테크에 딱 20개월을 다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생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겔싱어가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난 것이 컴퓨터였다. 지금의 컴퓨터가 아니다. 종이에 구멍을 내 컴퓨터를 작동해야 했던 시절이다. 시골 출신 겔싱어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
20개월의 학습이 끝나갈 무렵, 여러 정보기술 회사의 구인 담당자들이 학교를 찾아왔다. 그중에 인텔도 있었다. IBM, HP와 같은 대기업에 비하면 인텔은 작은 회사였다. 워낙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시골 전문대에까지 기업이 찾아왔다.
면접관인 론 스미스는 겔싱어를 포함해 몇 명의 학생을 캘리포니아로 초대했다. 겔싱어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다. 부모는 이역만리에 있는 것 같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을 다루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간다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겔싱어도 그랬다.
그리고 몇 달 후 링컨 테크를 졸업한 겔싱어는 다시 캘리포니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애송이 전문대 졸업생은 미래의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 말단 직원이 됐다. 30년간의 인텔 1기 생활이 시작됐다.
인텔 직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18세의 청년은 질주를 멈출 수 없었다. 상사와 동료들이 일을 알려줬고 공부를 더 하기를 권했다. 입사 이듬해 산타클라라 대학에 편입해 졸업했다. 회사의 금전적인 지원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공부다.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 회사로 출근했다. 이어 반도체 분야의 산실이나 다름없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땄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겔싱어의 반도체 여정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