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내가 사겠다”…경매 입찰 나선 깡통전세 피해자

[아시아경제 류태민 기자] 두 달 전 서울 서부지방법원에서 열렸던 법원 부동산 경매 현장. 매물로 나왔던 은평구 구산동 소재 30.1㎡(전용면적)짜리 A빌라 1층 물건이 새 주인을 찾았다. 지난해 2월 처음 경매 물건으로 나온 지 9개월 만이다. 그동안 응찰하는 이가 없어 7번이나 유찰됐다. 결국 8차 경매에서 감정가 1억300만원의 21% 수준인 2160만원에 낙찰됐다. 하지만 알고 보니 새로 집주인이 된 낙찰자는 현재 해당 빌라에 거주 중인 세입자 전모씨였다. 이른바 ‘깡통전세’가 돼버린 해당 주택을 아무도 사려 하지 않자 임차인이 직접 나서 집을 사들인 것이다.

계속되는 주택시장 침체로 법원경매 시장마저 얼어붙자 직접 해당 주택을 낙찰받는 깡통전세 피해자들이 늘고 있다. 아무도 입찰하지 않아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이 없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세입자가 직접 응찰에 나선 것이다.

12일 법원경매 전문기업인 지지옥션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 임차인이 집주인을 상대로 경매를 신청한 규모는 총 521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2020년 하반기(319건), 2021년 하반기(410건)에 이어 매년 100건 넘게 증가한 수치다.

이처럼 임차인이 직접 경매를 신청한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늘어나면서다. 계약기간이 만료됐음에도 임차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자 직접 강제 경매를 신청한 것이다.

경매시장 ‘꽁꽁’ 얼어붙자… 낙찰가격도 ‘뚝뚝’

문제는 경매시장마저 얼어붙으면서 물건이 안 팔린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서울 빌라의 낙찰률은 11.1%로 나타났다. 낙찰률은 입찰에 부쳐진 물건 중 낙찰자가 결정된 물건 수의 비율을 의미한다. 예컨대 낙찰률이 11.1%라면 경매로 나온 10건 중 1건 정도만 새 주인을 찾았다는 뜻이다. 인천과 경기의 지난해 12월 빌라 낙찰률도 각각 25.0%, 22.9%로 낮은 수치를 보였다.

아파트 시장도 한파다. 지난해 12월 서울 아파트 낙찰률은 17.9%로 대부분의 물건이 유찰됐다. 인천과 경기 역시 각각 23.1%, 25.0%로 대다수의 물건이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이같이 유찰이 계속되면 낙찰가격의 기준이 되는 최저가가 하락하게 된다. 서울의 경우 경매 물건이 1번 유찰될 때마다 직전 최저가의 20%씩 최저가가 줄어들게 된다. 예컨대 감정가 10억원인 경매 물건이 최초경매에서 유찰되면 2회 차 경매에선 최저 경매가 8억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회 차 경매에서 또다시 유찰될 경우 7억원의 20%를 차감한 6억4000만원이 3회 차 최저 경매가가 되는 것이다.

인천·경기 등 다른 수도권 지역은 유찰 저감률이 더욱 심하다. 1회 유찰될 때마다 30%씩 저감된다. 감정가 10억원 경매 물건이 3번 유찰될 경우 최저가격이 3억4000만원으로 급감하는 것이다.

연이은 유찰로 낙찰가격이 떨어지면 임차인이 돌려받을 수 있는 전세보증금도 줄어들게 된다. 낙찰대금에서 경매 진행 비용과 당해세 등 세금을 제한 이후에나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 낙찰가격마저 급락하니 세입자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경매 뛰어드는 세입자

최근 들어 아예 직접 경매에 뛰어드는 임차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지지옥션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임차인이 직접 거주하는 주택을 낙찰 받은 사례는 지난해 하반기 102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동기(48건)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전체로 하면 총 174건으로 전년(112건)과 2020년(99건) 대비 1.5배 넘게 늘었다. 특히 지역별로는 지난해 하반기 기준 서울이 62건으로 전체의 60% 이상 몰렸다.

특히 ‘빌라왕’, ‘건축왕’ 등 대규모 전세사기로 피해를 본 이들은 더욱 곤경에 처한 상황이다. 이들은 근저당이 잡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대항력마저 갖추지 못했다. 유찰이 계속되면 전세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데다, 거주하던 집에서마저 쫓겨나게 되는 셈이다.

실제로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소재 49.7㎡(전용면적)짜리 B아파트 10층 물건은 지난해 12월 3차 경매에서 임차인 박모씨에게 1억3700만원에 낙찰됐다. 인천 미추홀구 주안동 C빌라 5층 물건(67.1㎡)도 세입자 김모씨가 2회차 경매에서 1억8500만원에 낙찰받기도 했다. 이들은 미추홀구 ‘건축왕’으로 불리는 건축업자의 전세사기 피해자로, 살던 집이 1~2회 유찰되자 직접 응찰에 나선 것이다.

세입자가 직접 경매에 뛰어들 경우 낙찰대금을 보증금으로 상계처리가 가능하다. 해당 주택이 낙찰됐을 때 임차인이 돌려받을 수 있는 보증금만큼 낙찰대금에서 제외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낙찰금이 1억5000만원이고 세입자가 돌려받게 될 전세보증금이 5000만원이라면 해당 세입자는 모자라는 1억원만 지불하면 된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상계처리가 가능한 액수는 돌려받지 못한 ‘총 전세보증금’이 아니라 ‘낙찰 후 돌려받게 될 전세보증금’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세입자가 5000만원의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낙찰대금 배당 순위에서 밀려 3000만원만 돌려받게 된다면, 상계처리가 가능한 것은 3000만원이 된다.

류태민 기자 right@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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