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나영기자
송승섭기자
[아시아경제 심나영 기자, 송승섭 기자] 은행원들 사이에서 지점장 감별 기준은 딱 두 가지다. ‘좋은 지점장’과 ‘나쁜 지점장’. 좋은 지점장은 진상고객이 은행 창구에서 난리를 칠 때 맨발로 뛰쳐나오는 경우다. 인기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SS은행 지점장인 차승원은 발톱이 소파에 찍혀 피가 철철 나는데도 곤란에 빠진 부하 직원을 구하러 기어 나와 고객을 지점장실로 데리고 들어간다. 이런 지점장은 현실 세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나쁜 지점장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방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경우다. 특히 승진을 노리는 부지점장과 지점장이 있는 지점일수록 창구 직원들은 진상 고객에 휘둘린다. 부하 직원을 보호한다고 강경하게 대응했다가 금융감독원에 민원이라도 들어가면 승진 기회가 한방에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 필요없고, 지점장 대응이 답이에요. 아무리 삿대질하고 큰소리치던 사람도 지점장실로 들어가면 누그러지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지금은 한 시중은행 부은행장이 된 30년차 베테랑 은행원의 이야기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때를 떠올렸다. "은행에서 처음 펀드를 팔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아무도 예상 못했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원금도 못 찾게 된 고객들이 쏟아졌죠. 횟집을 하는 고객이 사시미칼을 가지고 오겠다고 협박하는 거에요. 경찰을 부르면 더 자극할 것 같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결국 지점장님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자기가 그 고객 손실액의 절반을 낼테니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보태달라고 했어요. 결국 그 고객이 겁박만 하고 끝나긴 했지만, 당시엔 지점장이 구세주 같았죠"
은행마다 블랙컨슈머 대응 매뉴얼이 있긴 있다. 우리은행은 폭력·폭언, 업무방해 등 유형별로 사례를 정리했다. 문제는 매뉴얼이 현장에서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1단계 ‘정중한 어조로 중지를 요청하라’, 2단계 ‘업무규정을 설명하고 고객을 진정시킨 뒤 중지를 재차 요청하라’, 3단계 ‘더이상 업무를 도와드릴 수 없어 죄송하다고 하라’는 식으로 끝난다. KB국민은행도 진상고객을 ‘특별민원’이라 지칭한 대응방안이 있다. 7년차 은행원 고지은(33·가명)씨는 "어느 블랙컨슈머도 이런 식으로 대응해선 해결될 수 없다"며 "은행 내에서도 대응은 지점장들이 하는 걸 권유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경험 많은 윗분들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찾긴 힘들다. 지난해 박성호 하나은행장이 직원들과 가진 비공개 간담회 자리에서는 "행장께서 블랙컨슈머로부터 직원들을 보호할 제도 마련 계획이 있는지 말해 달라"는 질문이 나왔다. 자체적으로 마련한 직원보호세칙이 있지만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박 행장은 "직원 보호가 여전히 영업점 단위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제도를 개선해보겠다"고 답했다.
블랙컨슈머가 지점장 선에서도 해결이 안되면 경찰을 부른다. 그래도 계속 찾아와서 협박을 하면 본사의 고충위원회와 상의해 법무팀과 법적대응에 들어간다. 한 시중은행 민원팀 관계자는 "형식적 단계일 뿐 실제로 법적 대응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오히려 악질고객에게 맞대응 하려다 '현타(현실자각타임의 준말)'가 왔다는 사례만 들릴 뿐이다. 민원을 받으면 핵심성과지표(KPI)가 깎이고 지점 보너스까지 줄어들 위험에 처하게 된다. KB국민은행에 다니는 3년차 직원 지선재(30·가명)씨는 "올해 초부터 진저리나게 하는 블랙컨슈머가 있어서 선배한테 경찰에 신고하고 KPI도 깎이자고 했다가 혼만 더 났다"며 "주말에 부지점장님과 그 고객 집 근처 카페까지 찾아가 민원을 취소해달라고 사정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심나영 기자 sny@asiae.co.kr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