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루트] 평민의 妻에 흑심 품은 王…'도미설화'

'부부의 신의와 절개' 지킨 설화… 삼국사기 '도미전' 근거

도미부인 초상화 [보령시]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경기도 하남시에는 예부터 백제의 '도미설화(都彌說話)'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도미설화는 모두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도미전'에 근거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도미부인(都彌夫人)' 설화는 다음과 같다.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 聞之, 召都彌 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 鮮矣乎!’ 對曰 ‘人之情, 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 無貳者也’ 王欲試之, 留 都彌以事, 使一 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 都彌 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人入室 吾更衣乃進. 退而雜飾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大怒, 誣都 彌以罪, ?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 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 他日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 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 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 高句麗 蒜山 之下. 麗人哀之, ?以衣食. 遂苟活, 終於羈旅. - 『三國史記』 列傳, 제8 '도미(都彌)조'

<i>'도미(都彌)'는 백제 사람이다. 평민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예뻤으며 또한 절개 있는 행실이 있어 당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i>

<i>개루왕(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더불어 말하였다. [왕이] "무릇 부인의 덕은 비록 지조가 굳고 행실이 깨끗함을 우선으로 하지만 만약 그윽하고 어두우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써 유혹하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미는] "사람의 마음이란 헤아릴 수 없으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i>

<i>왕이 그녀를 시험해 보려고 일을 핑계로 도미를 머물게 하고는 가까운 신하 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왕의 옷을 입고, 마부를 데리고 밤에 그 집에 가도록 시키고, 사람을 시켜 먼저 왕께서 오실 것임을 알리도록 하였다. [왕을 가장한 신하가]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네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미와 내기하여 그를 이겼으니 내일 너를 들여 궁인(宮人)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 다음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i>

<i>드디어 그녀를 간음하려고 하자 부인이 말하였다. "국왕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물러나서는 한 계집종을 치장하여 잠자리에 들였다.</i>

<i>왕이 후에 속았음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도미를 무고하여 처벌하였는데, 두 눈을 멀게 하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 작은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i>

<i>드디어 그의 아내를 끌어다가 강간하려고 하니, 부인이 말하였다. "지금 남편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의 시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향기롭게 목욕한 후에 오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믿고 허락하였다.</i>

<i>부인이 곧 도망쳐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다가 홀연히 외로운 배가 물결을 따라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타고서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그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i>

<i>풀뿌리를 캐서 먹다가 드디어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山) 아래에 이르렀다.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주었다. 마침내 구차히 살다가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i>

하남 도미나루 추정 장소 [하남시]

■ '도미나루' 관련 문헌 기록

하남에는 도미나루와 관련된 기록과 자취, 고지도가 존재하지만, 다른 지역은 설화에만 의존하고 있다.

보령시의 경우, 도미부인 사당을 만들어 영정을 봉안하고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하남 검단산 서북쪽 강기슭에는 백제 개루왕 때 도미부인과 관련한 도미나루로 추정되는 두 곳이 있다.

제1도미나루 추정지는 서쪽 창모루 나루터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도로의 강변 쪽 좌측이다.

지금은 식당이 들어서 나루터는 보이지 않고, 강 쪽으로 길게 강 돌과 축석이 쌓여 있어 과거에 나루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으로부터 약 200m 떨어진 동쪽이 제2도미나루로 추정되는 장소다.

팔당대교와 팔당댐 사이 문화 유적에 대한 지표 조사를 벌인 결과, 두 곳의 도미나루 추정지에서 건물지나 석축 자취 일부가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하남 도미나루 유적 [하남시]

하지만, 발견한 유물과 자취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 발굴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강 본류를 이루는 하남 지역 '도(두)미강'은 하남시 검단산과 남양주 예봉산 줄기를 만나 협곡을 이룬다.

그래서 '도미협' 또는 주변에 돌길이 길게 놓여있어 '도미천'으로도 부른다. 이곳에 '도미원'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도미'라는 어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도미부인' 설화와도 관련하고 있다. 이 설화는 하남뿐 아니라 서울 송파, 충남 보령, 경남 진해 등 여러 곳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설화에서 '도미'는 여종을 거느린 귀족이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도미나루' 문헌 기록 중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 왕실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돼있다.

선조(재위 1567~1608) 때 6차례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내리지 않자, 장소를 옮겨 '두미진(도미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선조 32년 5월 3일)

숙종(재위 1674~1720) 때는 4차례(숙종 21년 5월 11일, 23년 5월 16일, 27년 5월 18일, 30년 6월 26일) 기우제를 지낸 것으로 기록 돼 있다.

광주 도미진 부근에 있는 땔나무 파는 시장에서 유황이 나왔다는 보고가 있자, 숙종이 유황을 캐 사용하도록 지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숙종 36년 11월 28일)

하남 도미나루 추정 장소 [하남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도미진'이 동북쪽에 위치하며 나룻배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첫 장에 '도미설화'를 넣도록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도미진'이 양근군(지금의 양평) 동쪽 하류에 있으며, 그 북쪽 언덕을 '도미천(渡迷遷)이라 했다.

동쪽으로 봉안역을 향해 돌길이 약 1km 둘렀는데 신라 방언으로는 '물 언덕 돌길'을 천(川)이라 불렀다.

'두미구(斗迷口)는 '도미구(渡迷口)'라고도 하며 북쪽 약 9km에 위치했다. 동서 양쪽에 산이 강을 끼고 마주하며, 울퉁불퉁한 돌길이 산허리를 돌아 동쪽으로 험준하게 약 10km 뻗어 두미원(斗迷院)이 있었다.

한편, 도미를 겁간하려 했던 개루왕(蓋婁王)은 백제의 제4대 왕(재위 128~166)이다. 일부 학설에는 도미부인과 관련된 왕을 백제 제21대 왕 '개로왕(재위 455~475)'이라는 주장도 있다.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불러 수도를 함락당하고 영토도 잃어 아차산성 아래서 참수당한 비운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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