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운동장에서 사라진 '오징어 게임'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뭘 사고 먹고 마셔도 결국 다 시시해져 버려. (…) 그래서 다들 모여서 고민을 좀 해봤지. 뭘 하면은 좀 재미가 있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오영수)이 게임을 설계한 이유다. 네덜란드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놀이가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진다는 역설이었다.

놀이는 사람이 주도하고 창조한다. 사람은 이를 통해 인간다움을 찾아간다. 단 놀잇감이 화려하거나 놀이 행위 자체에 집중되면 위축되거나 가려진다. 비극적 결말을 맞는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처럼.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인 비생산적 활동이다. 사람은 현실에서 벗어난 허구세계에서 제각각 규칙에 따라 자유와 자율, 창조를 실천한다. 풍부한 경험은 정신의 긴장과 평형, 질서를 필요로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아가 문화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 성장기에 놀이는 삶 자체이기도 하다. 친구를 만나 서로를 느끼고 소중히 여기며 어울린다. 그렇게 나를 알아가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키운다.

상급학교 진학에 매달리는 오늘날, 이런 기회는 많이 사라졌다. 어른들부터 백해무익한 짓이나 시간 낭비로 치부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비대면까지 가속화돼 '놀이가 교육'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공부만을 강요받고 자란 청소년은 놀이하면서도 자유로움을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불안해하고 죄의식을 느낀다. 놀이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는 그들끼리 따로 모여서 즐기는 음성적이고 기형적인 문화를 만들어낸다. 청소년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인 일탈에 쉽게 빠져든다. 술·담배를 탐닉하고, 약물·성 문제·가출과 같은 비행·일탈까지 저지른다.

문제는 그나마 벌어지는 놀이에도 있다. 청소년은 줄 세우기식 등수 매김을 싫어하면서도 정작 경쟁 없는 놀이는 상상하지 못한다. 어른들의 서열 정리를 그대로 답습한다. 일부는 정해진 규칙까지 어기며 1등을 하려고 한다. 일관성 없는 뒤집기와 속임수, 요행으로 모두의 약속을 저버리며 놀이의 본질을 망가뜨린다. 이런 놀이에서 내적 만족이나 보람은 기대할 수 없다. 친구들과 깊은 만남이나 감격스러운 느낌도 다르지 않다. 외적 보상만이 허수아비처럼 남는다.

놀이가 사라진 세상은 정보화시대의 저질 정보들로 채워진다. 유튜브 등을 통해 깊숙이 파고들어 자제력 약한 청소년의 혼을 빼놓는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으로 만들어 사회적 범죄까지 유발한다. 마음이 병들고 지친 이들에게 놀이는 어떤 교육·상담·치료보다 더 효과적이다. 무아지경으로 유도해 내면의 자신을 만나고 건강해지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야말로 자유·자율·창조를 실천하며 회복하는 인간화다.

오일남은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참가자들보다 해맑은 얼굴로 놀이를 즐긴다. "어릴 땐 말이야. 친구들이랑 뭘 하고 놀아도 재밌었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 죽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느끼고 싶었어. 관중석에 앉아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그 기분을 말이야."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문화레저부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