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ge] 또 벨이 울렸다, 누가 가면일까

절친들의 휴대전화 공유 게임
저마다 꼭꼭 숨겨둔 비밀 폭로
2018년 흥행 영화…올해 초연

긴 식탁에 일렬로 앉은 배우들
숨길 수 없는 심리관찰이 묘미

연극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사진제공=쇼노트)

[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며칠 전 아내가 이혼녀로 행세하며 남성 수십 명과 외도한 사실을 알게 됐다는 한 직장인의 사연이 포털 주요 뉴스에 게재됐다. 남편은 아내 휴대전화의 구글 타임라인으로 아내가 8개월간 30차례 모텔에 출입한 기록을 확인했고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한강공원에서 실종됐다가 시신으로 발견된 한 대학생의 친구 A씨의 휴대전화가 발견됐다는 보도도 포털에 주요 뉴스로 걸려 있었다. 경찰이 디지털 포렌식에 들어가 사건 해결의 주요 실마리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인류가 이른바 ‘호모 스마트포니쿠스(Homo Smartphonicus)’로 불리는 오늘날 휴대전화는 인간의 블랙박스다. 위치·결제 정보, 통화·메시지 기록, 취향, 검색 내용 등 특정인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유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휴대전화에 차곡차곡 쌓인 진실은 누군가에겐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누군가에겐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여기 3쌍의 부부와 한 명의 솔로가 있다. 이들은 절친한 사이로 저녁 모임에서 만났다. 한 친구가 흥미로운 게임을 제안한다. "우리 휴대전화에 오는 모든 전화와 문자를 저녁 시간 내내 공유해보자." 몇몇은 쿨한 척 휴대전화를 내놓는다. 하지만 일부는 망설이다 마지못해 꺼낸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7개의 휴대전화.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눈빛에 묘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서려 있다. 창문 너머로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연극 ‘완벽한 타인’의 도입 장면이다. 올해 초연인 ‘완벽한 타인’은 숨겨둔 저마다의 비밀이 휴대전화로 폭로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심리적 변화와 갈등을 그렸다. 2016년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파올로 제네베제 감독의 동명 영화가 원작이다. 한국에서도 2018년 리메이크된 영화는 관객 500만명을 불러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연극 '완벽한 타인'에서 비앙카를 연기한 배우 임세미.(사진제공=쇼노트)

연극에서는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장면 밖 인물들의 표정까지 세세히 감상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네모난 식탁에 7명이 모여 있지만 연극에서는 무대 맨 앞 가로로 긴 일자형 테이블에 배우들을 일렬로 배치했다.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얼굴에 나타나는 변화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배우들은 식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쇼파·주방·테라스·화장실까지 오가며 극을 생동감 있게 이끈다.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배우들이 썼던 ‘가면’을 지칭한다. 이후 라틴어와 섞여 사람(person), 인격(personality)의 어원이 됐다. 정신분석학에서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페르소나와 관련해 "자아와 본성은 감추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일종의 연기"라고 규정했다. 융은 인간이 1000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상황에 맞게 꺼내 쓴다고도 주장했다.

‘완벽한 타인’은 휴대전화 공유 게임으로 인간이 쓴 페르소나를 벗긴다. 이어 우리가 과연 절친이나 가족, 연인의 본모습을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묻는다. 오히려 실체를 아는 게 과연 바람직할까, 아예 모르고 사는 게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만월이 늑대인간을 각성시키듯 월식이 무르익을수록 7명의 관음증적 욕망은 더 증폭된다. 총알 한 발만 피하면 되는 러시안 룰렛을 즐기는 듯하다.

불행하게도 휴대전화를 공유해 상황이 나아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외도 사실이 밝혀지거나 괴팍한 취미가 드러나는 등 서로의 관계를 해치기만 한다. 어렸을 적부터 친했던 사이지만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성 정체성마저 드러난다. 몇 시간 만에 파국으로 치달은 이들의 관계는 영영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연극 '완벽한 타인'의 극 중 장면(사진제공=쇼노트)

엔딩 신은 애초에 휴대전화 게임을 하지 않고 저녁 식사 후 서로 배웅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게임을 한 상황이 실제인지 허구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남편 코지모가 다른 여자와 만나 임신시킨 사실조차 모르고 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대하는 비앙카. 아내 에바가 절친 코지모와 외도한 사실은 모른 채 더 나은 부부관계를 위해 노력하자는 로코. 어쩌면 이게 사랑과 평화의 본모습 아닐까.

타인에게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 비밀번호와 패턴에 생체인증까지 더해 꼭꼭 숨겨둔 ‘본래의 나’는 어쩌면 개기월식처럼 완전히 가려졌을 때 더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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