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기자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페르디낭 포슈 장군의 동상[이미지출처=파리관광청 홈페이지/https://parisinfo.com]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연합군 총사령관인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엘랑비탈(Elan Vital)'이라고 명명된 공세주의 교리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엘랑비탈은 프랑스어로 '삶의 도약'이란 뜻으로, 능동적 공격을 통해 적을 격파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도부는 졌다고 판단하기 이전까지 전쟁 의지를 갖고 계속 싸워야 하며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생각으로 대규모 보병을 적시에 투입해 전선을 돌파해야 한다는 교리였다.
그러나 정작 엘랑비탈 교리는 1차 대전 당시 포슈 장군의 주요 전술이론이 아니었다. 이 교리는 그가 1차 대전 발발 10여년 전인 1902년 프랑스 육군대학 교장 재직 당시 사병들의 정신교육용으로 만든 매뉴얼에 불과했다. 오히려 포슈 장군은 1차 대전 당시 기관총과 대포 등 무기 기술발전으로 19세기까지 통용되던 보병돌격 작전을 지양하고 보병의 진격 이전에 포격전을 통해 적의 진지를 먼저 초토화한 후 보병이 투입돼야 한다는 화력 중심 전술을 주장했다.
하지만 1차 대전 전후 엘랑비탈 교리는 당시 일본에 잘못 받아들여졌다. 일본 육군은 유럽 최강이라 불리는 프랑스군의 선진 교리라며 장교들에게는 백병전에 쓸 군도를 지급하고, 병사들에게 총검술을 가르쳤다. 일치단결된 정신력으로 전군이 전선을 돌파하면 기관총이나 대포로도 아군의 기세를 막지 못해 적이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이 설파됐다. 이로 인해 메이지유신 초기 서양의 화력을 경험한 이후 총검술보다 화력에 몰두하던 일본군의 전술은 오히려 시대적으로 후퇴했다.
여기에는 1920년대를 전후로 전투기, 탱크 등 대량살상무기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낡은 무기체계를 바꾸지 못하고 있던 일본군의 실정이 숨어 있었다. 철강생산력과 기술력,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일본은 부족한 예산을 갖고 값비싼 새로운 무기체계를 빠르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현실을 회피하는 방안으로 일본군은 엘랑비탈 교리를 근거로 정신력이 기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병사들에게 불어넣었다.
이 자신감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막대한 인명손실로 이어졌다. 엘랑비탈을 강조한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230만명이 사망한 사이 미군은 11만명이 전사했고, 영국과 호주는 양국을 합쳐 1만5000여명이 전사하는 데 그쳤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종전 2년 전인 1943년에 결정됐지만 끝까지 엘랑비탈 교리의 전쟁의지를 강조한 일본군 수뇌부의 고집 속에 죽지 않아도 될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참혹하게 희생됐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