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취산화서(聚散花序)/송재학

수국 곁에 내가 있고 당신이 왔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인 채 나에게 왔다 수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깐 숨죽이는 흑백사진이다 당신과 나는 수국의 그늘을 입에 물었다 정지 화면 동안 수국의 꽃색은 창백하다 왜 수국이 수시로 변하는지 서로 알기에 어슬한 꽃무늬를 얻었다 한 뼘만큼 살이 닿았는데 꽃잎도 사람도 동공마다 물고기 비늘이 얼비쳤다 같은 공기 같은 물속이다

■ 아름다운 시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면 그래, 정말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학연이나 지연, 돈이나 권력 따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라, 그것이 진정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면 “물고기 비늘” 같은 “어슬한 꽃무늬”를 눈동자에 나누어 담다 문득 서로를 알아보는 그런 향기로운 사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첫 나비를 따라 함께 걷다 만난 사이나, 어둑한 저녁 강가에서 노을 한 자락씩을 가만히 바라보다 어깨를 나누어 준 사이, 서리 낀 차장에 얼비친 ‘사랑해’라는 낯모르는 글씨에 엄지손가락 도장을 슬며시 꾸욱 찍어 보는 사이, 그런 “흑백사진” 같은 사이, “같은 공기 같은 물속” 같은 사이가 저 오손도손한 꽃차례 같은 인연 아니겠는가. 채상우 시인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