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희의 On Stage] 힐 높이 낮아도 매력적인 그녀

'비너스 인 퍼' 벤다 役 이경미 "섹시하고 상상력 자극하는 연극…관객은 단순하게 즐기길"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무대 위에서 배우 이경미의 목소리는 잘 벼린 칼 같다. 상대 배우에게는 날카롭게 꽂히고, 관객들에게는 배우 이경미를 각인시키는 무기다.

이경미는 지난 4월 연극 '인형의 집 파트(Part) 2'에서 '에미'를 연기했다.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가 15년 만에 돌아온 엄마 '노라'를 당신이라 칭하며 날카로운 딕션(발음)으로 매섭게 몰아붙였다. 남편 토르발트에게 당당하게 이혼합의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요구하던 노라는 에미의 기세에 눌려 주춤한다.

충무아트센터에서 하고 있는 연극 '비너스 인 퍼'에서도 이경미의 딕션은 빛을 발한다. 비너스 인 퍼는 2인극이다. 이경미는 상대 남자 배우 '토마스'를 꼼짝 못 하게 제압하는 '벤다'를 연기한다. 이경미의 날카로운 딕션은 상대를 제압하는 벤다의 캐릭터를 형성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딕션에 신경을 많이 쓴다. 내가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대사가 안 들리면 너무 불편하고 화가 난다. 내가 공연을 할 때는 그렇지 않았으면 해서 더 신경을 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극에서 벤다는 여배우, 토마스는 극작가 겸 연출가다. 극은 벤다가 객석에서 무대로 뛰어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벤다가 오디션에 늦은 상황. 토마스는 마음에 드는 여배우를 찾지 못해 화가 나 있다. 오디션에 늦은 벤다가 달가울 리 없다. 벤다는 토마스의 문전박대에 굴하지 않는다. 결국 벤다는 오디션을 보게 되고 토마스가 상대 역을 해주면서 극중극이 전개된다. 극중극에서 벤다의 역할은 백작 부인 두나예브. 토마스는 채찍을 맞으며 쾌락을 느끼는 쿠셈스키를 연기한다. 극중극에서는 벤다와 토마스의 권력 관계가 뒤집힌다. 토마스는 서서히 벤다의 연기에 매력을 느끼고 뒤바뀐 권력 관계는 점점 현실로 바뀐다. 극은 벤다가 토마스의 양 손을 스타킹으로 묶어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면서 끝난다.

이경미 [사진= 달컴퍼니 제공]

비너스 인 퍼는 1870년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가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 비너스 인 퍼는 이성에게 학대와 모멸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변태적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사도 마조히즘(SM)이 소설의 소재다.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비너스 인 퍼를 쓴 자허마조흐의 이름에서 파생됐다.

SM을 다루는만큼 연극도 섹시함을 표방한다. 벤다는 망사 스타킹에 짧은 핫팬츠, 레이스가 화려한 도발적인 민소매 차림으로 무대를 누빈다. 하이힐의 높이가 다소 아쉽지만 이경미가 보여주는 벤다의 매력은 부족한 힐의 높이를 채우고도 남는다. 도발적 대사로 벤다라는 매력적 캐릭터를 보여주고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벤다와 토마스가 접촉하는 장면은 한 번뿐이다. 그나마 초연 때는 접촉이 없었는데 재연하면서 하나 집어넣었다. 접촉이 없더라도 섹시한 느낌을 주는 연극이다. 벤다와 토마스가 주고받는 모호한 느낌의 말들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다." 이경미는 좌충우돌하는 벤다를 표현하기 위해 힘을 주고 무대 위를 뛰어다닌다. "힐이 별로 안 이쁘죠? 하이힐의 매력이 있긴 한데 높은 힐을 신고 계속 하면 도가니가 나가고 말거다."

비너스 인 퍼는 2017년 초연했다. 당시 더블 캐스트로 네 배우가 출연했는데 재연에 다시 출연한 배우는 이경미가 유일하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경미는 비너스 인 퍼가 데뷔작 '뜨거운 바다(2012년)'만큼 사랑스러운 작품이라고 했다.

"20대 초반에는 열심히 하면 좋은 작품이 오고 기회가 오는구나 싶었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 그런게 아니구나라고 느꼈다. 또 여배우가 연극에서 소모되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비너스 인 퍼는 연극에 권태를 느낄 때 들어온 작품이었다. 이렇게 여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은 대본이 나에게 온 것이 너무 좋아 눈물이 났다."

SM이라는 소재 탓에 연극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경미는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연기를 하는 우리는 비너스 인 퍼를 단순하게 분석하지 않았지만 관객들은 단순하게 봤으면 좋겠다. 벤다가 토마스를 혼내주러 온 그런 코미디로 봤으면 좋겠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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