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물의 이미지/성윤석

서울역에 내려 지하도 건너 남대문까지 걸어가다 보면 모두가 구멍을 손으로 막고 있다가 나온얼굴들을 하고 있다그들의 저수지는 늘 둑방에 구멍이 나고 우리의 대지는늘 물보다 낮아서네덜란드 소년처럼 팔뚝으로버티다가 나온 얼굴들을 하고 있다간혹 손을, 팔을 버리고 떠난가족들이 생겼다 그들의 저수지는넘쳐 이웃들에게 흘러갔다물속에 가라앉았다가 시체처럼 떠오르는잎이여우리의 위에 있는 물의 저수지 햇빛을 받아윤슬로 반짝이지만옆구리에 호수를 달고 누워 있는 병실의 사내처럼사는 일은 물에 쓸리다가 쓸리다가그만 구멍을 내줘 버린 것우리의 대지는 늘 물보다 낮아서가득 검은 눈썹을 비껴 눈에서 넘쳐흐르네
■이 시 속에 삽입된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알 것이다. 제방에 난 구멍을 온몸으로 막아 마을을 지켜 냈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가 희생정신인지 멸사봉공인지 혹은 체력 증진인지는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네덜란드의 국토 가운데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는 어리둥절한 사실은 확실히 기억난다. 각설하고,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동화다. 우리가 겪고 있는 실제는 이렇다. "우리의 위에 있는 물의 저수지"는 눈부신 "햇빛을 받아" "윤슬로 반짝이지만" "우리의 대지는 늘 물보다 낮아서" 언제 범람할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저 "옆구리에 호수를 달고 누워 있는 병실의 사내처럼" 사는 일에 "쓸리다가 쓸리다가" "그만 구멍을 내줘 버"리고 "물속에 가라앉았다가 시체처럼 떠오"를 뿐이다. 차라리 잔혹동화였으면 싶겠지만. 채상우 시인<ⓒ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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