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실패의 축적

[아시아경제 서소정 기자]최근 한 바이오·제약회사의 연구개발(R&D) 워크숍이 때아닌 붐을 이뤘다. 이 워크숍 행사에 초청된 한 대학교수의 강연을 들으러 직원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운 까닭이다. 이날 연사는 최근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으로 산업계에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서울대 공대 이정동 교수였다. 축적의 시간. 서울대 공과대학 26명의 석학이 한국 산업의 미래를 제언하기 위해 집필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벤치마킹과 빨리빨리 속성재배 문화로 지난 반세기 만에 세계가 놀랄 만한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신화를 만든 대한민국이 현재 중국 등 개도국의 추격과 신성장동력 부재로 '정체의 늪'에 빠진 것은 '창조적 축적'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6명의 교수들은 입을 모아 현 산업 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를 꼽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제시한 개념설계를 빠르게 모방·실행하면서 성장해왔지만,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최초의 설계도를 그려낼 수 있는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문제의 핵심은 개념설계의 역량이 바로 '시행착오의 축적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실패엔 지나치게 냉혹하고, 성공엔 지나치게 관대하다. 미국 벤처창업의 산실인 실리콘밸리도 사실은 성공의 도시가 아니라 실패의 도시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트위터 등 실리콘밸리 대표 기업들은 상당한 기간동안 실패를 경험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실패 했을 때 좌절하지 않고 이를 축적해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았다는 거다. 2013년 세계 최대 휴대폰 업체 노키아가 몰락했을 때 모두들 핀란드의 미래를 걱정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핀란드의 모습은 우리가 염려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 노키아의 침체로 오히려 젊은이들 사이 스타트업 창업이 붐을 이뤘다. 정부는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노키아도 실패를 자산 삼아 휴대폰 사업 대신 통신장비와 헬스케어 분야에서 부활을 노리고 있다. 바이오·제약회사는 신약을 개발하고 판매에 성공하기까지 임상시험 등을 거치며 수많은 실패를 맛본다. 이런 연유로 축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사의 말에 깊은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이는 비단 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새로운 개념에 대한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격려하면서 실패의 경험을 축적해가는 조직·사회 문화가 '제2 코리아 신화'를 창조할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소정 기자 ssj@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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