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두 의사

[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이 사건에 대해 훗날 제 자식들이 물어온다면 ‘어떤 경우든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아버지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했다’고 들려줄 작정입니다.”1987년 12월30일자 동아일보가 ‘올해의 인물’로 뽑은 의사 오연상씨의 말이다. 그해 초 일어난 대학생 박종철씨 사망 사건이 물고문 때문이었임을 세상에 알렸다.당시 중앙대 용산병원 전임강사였던 30살 청년 오씨는 응급실장의 긴급호출을 받고 수사관들을 따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갔다. 509호 조사실. 바닥에 온통 물기였다. 발가벗겨진 채 침대에 누워있는 한 젊은이의 배에서는 꼬르륵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숨진 상태였다. 수사관들은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사망 시점의 장소로 대공분실과 병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망 원인이 은폐될 수 있다. 오씨는 몰래 병원으로 전화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고 알렸다. 결국 중앙대병원 측의 제지로 시신은 경찰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이후 오씨에게는 수사관 3명이 감시조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화장실까지는 따라 오지 않았고, 그 곳에서 기막히게도 한 기자를 우연히 만났다.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있었다. 박군도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고문이 횡행하던 야만의 시절, 쉽게 낼 수 있는 용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쥐어짜듯이 내뱉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용기는 세상을 바꿨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의사는 또 있다. 이번에는 지독한 불명예다. 서울대병원이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병사'에서 '외인사'로 전격 수정하면서, 주치의였던 백선하 신경외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 되겠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70대 노인의 죽음에 대해 ‘병사’라고 한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웠고, 의료계에서도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백 교수는 지난해 10월 기자회견에서 “어떠한 형태의 외압도 없었고 소신대로 기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했는지에 대해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게 객관적 정황이다. 결과적으로 오씨는 정권의 악마성을 폭로했고, 백 교수는 경찰 폭력에 면죄부를 부여한 셈이 됐다. 오씨는 10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박종철 사건으로 신을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우연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2년 쯤 후에 기독교 신자가 됐다고 한다. 눈 앞에 보이는 안락 때문이거나, 혹은 두려움에 굴복해 양심을 버린다면 결국에는 오랜 고통을 피할 길이 없겠다. 죽음 이후를 믿는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한 발치 앞만 내다보다가는 추락하기 십상이다. 아주 짧게 본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려는 소망을 접어야 하는 것이 매우 치명적이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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